예배당에 매이지 않는 기독교 / 왕상 8장 / 사도행전 7장 / 예레미야 29장 / 이사야 1장

예배당에 매이지 않는 기독교 / 왕상 8장 / 사도행전 7장 / 예레미야 29장 / 이사야 1장

0:00 시작합니다 0:33 Overture: 예배당인가, 교회인가. 1:38 1악장: 하나님이 계시는 곳 4:24 2악장: 움직이시는 하나님, 흩어지는 백성들 6:19 3악장: 건강한 사회를 세우는 소명 9:58 Coda: 참된 예배의 회복 #비대면예배 #스데반설교 #사도행전7장 예배당에 매이지 않는 기독교: 사회의 평안과 번영을 구하는 세계관 많은 교회들이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감염을 예방하고, 또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예배당에 모이지 않고 여러가지 방식으로 흩어져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 드리면 죽인다고 칼이 들어올 때, 목숨을 걸고 예배 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예배 모임이 칼이 되어 남들의 목숨을 위태하게 하면, 모이지 않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종학). 이 말에서 우리는 신앙에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러나 여전히 찜찜함이 남기도 한다. 주일에는 주일의 주인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교회에 나가서 주일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Overture: 교회인가 예배당인가?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예배당과 교회는 구별해야 한다. 예배당은 건물이고 교회는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이다. 1악장: 하나님이 계시는 곳, 건물인가 ‘하늘’인가?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께서 땅 위에 계시기를, 우리가 어찌 바라겠습니까? 저 하늘, 저 하늘 위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시기에 부족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성전이야 더 말하여 무엇하겠습니까?” (왕상 8:27).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대해 예수님은 명확히 알려주셨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마 18:20). 2악장: 움직이시는 하나님, 흩어지는 백성들 구약에서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가 성전과 관련해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대한 통찰을 주는 구약 말씀이라면, 신약에서는 스데반의 설교 그러한 주제를 다룬다 (왕상 8; 행 7). 스데반 설교의 핵심 중 하나는 하나님이 움직이신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에게서 시작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은 메소포타미아에 나타나심으로 시작되어 아브라함이 하란에 머물렀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를 이끄셨다(2-4절). 요셉이 이집트에 팔려갔을 때에도 거기서 그와 함께 하셨고 야곱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학대 받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소리를 들으셨다(9, 17, 34절). 모세가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땅에 도망가 나그네가 되었을 때 시내산 광야에서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해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나게 하시고 그들이 시내 산에 이르렀을 때 거기서 말씀하셨다(30-38절).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광야의 장막은 원래 움직이는 것으로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으며 성전은 나중 되어서야 다윗의 바람을 따라 솔로몬이 지은 것이다(44-47절). 스데반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거하지 않으십니다”라고 결론을 맺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으로 만든 것이기에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어 드린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생각이며 굳이 말하자면 하늘과 땅이, 즉 온 세상이 하나님의 보좌이자 발판이라는 이사야 66:1-2절을 인용하며 설교를 마친다(49-50절). 스데반은 하나님은 건물에 매이지 않으시는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실히 한다. 모일 뿐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와 함께 하나님은 움직이신다. 3악장: 건강한 사회를 세우는 소명 예레미야 29:1은 바빌로니아로 유배간 사람들을 “느부갓네살이 … 바빌로니아로 잡아간” 사람들이라고 묘사한다. 그런데 동시에 4절과 7절은 그들을 “하나님께서 바빌로니아로 잡혀가게 한” 사람들이라고 묘사한다. 포로로 잡혀간 상황은 인간의 활동의 결과였고 동시에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그렇기에 “예레미야는 포로들에게 그들이 처한 환경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정착하라고 설득했다. … 바벨론은 그들의 영원한 고향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현재 사는 집이었다”(라이트, 하나님의 선교, 123). 메시지 성경은 예레미야 29:7을 이렇게 번역했다. “그곳을 고향 삼아 지내고 그 나라를 위해 일하여라. 그리고 바빌론의 번창을 위해 기도하여라. 바빌론이 잘되는 것이 너희에게도 좋은 일로 여겨라.” 여기서 “번창”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샬롬”이다. “샬롬은 온전함, 곧 한 사회의 역동적이고 생동감 있는 건강을 뜻하는 것으로서, 그런 사회는 신의 목적에 합당한 방향으로 고동치고 삶을 변혁시키는 사랑으로 물결치는 사회다.” 포로로 잡혀갔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동시에 바빌로니아를 하나님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역동적이고 건강한 사회,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나아가는 사회로 만드는 시민의 몫을 감당해야 했다. 우리 신앙은 교회의 부흥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번영을 추구한다. 온 인류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함께 살아야 할 하나님이 창조하신 공동체이며, 하나님은 인류의 번영 자체를 바라고 기뻐하시며, 새 하늘과 새 땅은 온 인류의 번성한 문화로도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창 1:28; 사 60:4-9; 계 21:24-27; 마우 참고). 우리는 신앙 공동체의 멤버일 뿐 아니라 한 사회의 시민이다. 더 이상 장소는 문제가 아니다 영과 진리 만이 문제이다 (요 4:21-24). 이것이 우리가 예배당 중심의 기독교를 탈피해야만 하는 이유다. Coda: 진정한 예배의 회복 이사야 1장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사 1:11-15). 하나님의 이런 반응의 이유가 말씀 속에 심겨 있다. 예배와 함께 못된 짓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죄 없는 사람이 흘린 피가 손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정성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일상의 삶이 악하면 주일에 아무리 정성스럽게 예배를 드려도 그것은 뜰만 밟는 예배일 뿐이다. 하나님은 참된 예배를 회복하는 길을 이어서 알려주신다.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사 1:16-17). 잘못된 예배는 사회적 정의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사회적 불의는 삶이 빠진 예배를 통해 면죄부를 획득한다. 잘못된 예배는 윤리를 하찮게 여기며, 윤리 없는 예배는 종교적 기만일 뿐이다. 예배 회복의 핵심 열쇠는 예배 자체가 아니라 예배자의 일상의 삶이다. 이것이 단지 뜰의 회복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의 회복을 소원하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심각한 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