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곽재TV를 시작합니다. 부곽재(負郭齋)의 뜻, 합종과 연횡, 소진과 장의, 공자,天將降大任於是人也, 使我有雒陽負郭田二頃, 吾豈能佩六國相印乎!

부곽재TV를 시작합니다. 부곽재(負郭齋)의 뜻, 합종과 연횡, 소진과 장의, 공자,天將降大任於是人也, 使我有雒陽負郭田二頃, 吾豈能佩六國相印乎!

부곽재TV를 시작하면서 부곽재의 명칭에 얽힌 이야기부터 풀어 봅니다. [부곽재 당호를 얻게 된 연유] 전국시대 최고의 유세가는 소진(蘇秦)과 장의(張儀)였다. 이들은 귀곡자(鬼谷子)에게 유세술을 배우고 나서 각기 칠웅(七雄: 秦, 齊, 楚, 韓, 魏, 趙, 燕)의 왕들에게 돌아다니며 자신들의 주장을 펴나갔다. 당시는 서쪽 진(秦)나라가 세력이 가장 커서 나머지 여섯 나라(이들을 효산 즉 함곡관 동쪽에 있다 하여 山東六國으로 불렸음)가 모두 힘을 합해도 대항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진나라는 끝없는 동진정책을 써서 이들 산동 육국은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영일(寧日)이 없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를 간파한 소진은 소위 합종설(合從說), 즉 세로로 여섯 나라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참고로 장의는 각 나라가 진나라에 굴복하여 따를 것을 주장하는 連橫說을 폈음.) 그러나 처음 소진이 나섰을 때 어느 나라 군주도 손사레를 치면서 말도 안되는 소리라 하였다. 결국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소진은 결국 노자도 바닥나고 몸은 지쳐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소진의 고향은 낙양(洛陽, 雒陽) 변두리 벽촌이었다. 낙양은 당시 명의상 종주국 동주(東周)의 서울이었지만 몰락하여 폐허에 가깝게 되고 만 곳이었다. 그런데 실패하고 돌아온 소진에게 아내는 베틀에서 내려오지도 않았고, 형수는 밥도 제대로 지어주지 않으며 부모조차도 더불어 말을 하려 들지 않았다. 소진은 다시 다락방에 올라가 자신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여 유명한 췌마법(揣摩法: 상대 마음속 절실히 원하는 바를 찾아 설득시키는 일종의 심령술)을 터득하여 다시 나서서 결국 여섯 나라 왕들 모두를 설득시켜 드디어 육국연합을 이루어, 여섯 나라가 모두 그에게 재상자리를 주었다. 소진은 여섯 나라 재상 도장을 허리에 차고 어디에 있건 해당 나라의 재상 도장을 찾아 결재를 하는 큰 인물이 되었다. 성공하고 고향에 가지 않는 것은 금의야행(錦衣夜行)! 드디어 그는 금의환향(錦衣還鄕), 아니 고향에 가서 자랑하고 싶어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고향 낙양 벽촌을 찾았다. 그러자 그곳 사람들은 달려 나와 길을 쓸고 청소를 하고 소진을 맞았다. 자신을 멸시하던 가족은 엉금엉금 기면서 굽신거렸고, 형수는 먼발치에 숨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를 전거후공(前倨後恭)이라 한다. 형수가 “도련님은 지난날에는 별 볼일 없었지만 지금은 재상, 그것도 여섯 나라 동시 재상이 되셨고 돈도 많기 때문”이라 하자 소진은 이렇게 한탄하였다. “만약 나에게 이 낙양성을 등진 비탈밭 두어 뙈기만 주어졌던들, 내 어찌 지금 여섯 나라 재상의 도장을 찰 수 있었겠는가?”(使我有雒陽負郭田二頃, 吾豈能佩六國相印乎!) [사기]와 [전국책]에 실려 있는 고사이다. ‘負郭’은 풀이 그대로 성의 외곽을 짊어지듯 성 밖의 비탈진 땅으로 도저히 농사짓고 살 수 없는 열악하고 척박한 곳을 일컫는다. 그러한 곳일지라도 그저 농토 두어 골만 있어도 그것 파먹고 일생을 견뎌 살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가난, 결여, 빈곤은 도리어 엄청난 재산일 수 있다. 그것조차 없었기에 뛰쳐나오는 계기가 되었고, 어떤 고통도 이겨내는 동력이 된 것이다. 나는 어려서 정말 고생이 많았다. 태어나자 625가 터져 산속 화전민이 되었지만, 거기에 그 어떤 땅도 없이 사경을 헤매는 굶주림끝에 다시 가족이 뿔뿔이 헤어져 아버지 손에 끌려 2년을 멀리 어머니의 생사도 모른 채 그리워하다가 그나마 글을 안다는 이유로 고향에 호적을 떼러 갔다가 어머니를 만나 합치게 되었다. 그리고 소년이 되어 굶어죽을 바에야 어디나 똑같을 거라는 생각에 홀로 무작정 상경, 신문배달 고학으로 고교를 마치고 끝내 유학까지 가서 어려운 학위를 취득하여 귀국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귀국하여 살 곳이 없어 자하문 넘어 부암동 산꼭대기에 전세를 들었는데, 부엌도 없는 그 집은 성벽이 벽이었고 뱀이 들어오기도 하였다. “아하! 어쩌면 이를 그대로 부곽일까?” 그래서 옳지 내 공부방을 ‘負郭齋’라 하자! 그리고는 당시 나를 아껴주던 유명 서예가는 먼저 나서서 크게 붓글씨로 써주었고, 이를 서각까지 하였으며 아름다운 전서로 ‘負郭齋藏書’ 전각작품까지 해 저어 보물 1호로 간직하게 되었다. 나는 가난을 한 번도 부정적으로 여긴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나를 키워준 고마운 자산이라 여겨왔다. 다만 서럽고 부끄러워 표현을 하지 않아왔을 뿐이다. 그리고 함께 써준 맹자≪孟子≫의 “天將降大任於是人也”를 늘 외우고 다녔다. 공자(孔子)도 “나는 어려서 빈천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비사(鄙事: 하찮은 일)에조차 능한 것이란다”라고 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