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기적으로 일어선 대한민국의 상징, 경복궁의 역사2부
모두 불타버렸던 경복궁, 어떻게 재건되었나? 2부가 시작되었습니다 2부에서는 태종때부터의 경복궁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아, 시작하기전에 구독과 좋아요, 알람설정 꼭 부탁드리고요 슬슬 출발 해볼까요? 레엣츠으 고오오오오! 4 태종이 고친 경복궁 창건 이후, 경복궁은 정정의 불안으로 버려지게 되고, 조선 3대 왕이자 태조의 아들인 태종이 1404년에 창덕궁을 창건되면서 경복궁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태종은 삼문삼조를 따르고 있어 딱딱한 질서가 보이는 경복궁의 보다 배치도 자유롭고 아름다운 후원도 있는 창덕궁이 더 맘에 들었나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법궁을 아예 버려두지는 않습니다 태종6년인 1406년에 경복궁의 수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6년 뒤인 태종12년에 작은 누각이 있던 곳에 경회루를 세우고 못을 넓게 파서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하였다고 하네요 慶會는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 서로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요 이 경회루는 건축 평면에 조선 사람들이 생각했던 자연의 이치를 담고 있는 흥미로운 인데요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1865년 정학순(丁學洵)이라는 사람이 쓴 경회루 36궁지도라는 책은 경회루의 평면 구성에 자연의 이치가 담겨져 있음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경회루의 평면을 보면 정면이 7칸, 측면이 5칸으로 되어있고, 전체의 기둥 수는 48개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전체 기둥 수의 절반인 24개의 기둥이 바깥쪽에 세워지고 나머지 24개의 기둥이 안쪽에 세워져 있죠 바깥쪽의 24개 기둥들은 1년을 24개로 나누어 정한 절기인 24절기의 한 절기에 해당됩니다 북쪽 중앙 칸의 서쪽 기둥이 팥죽을 먹는 절기인 冬至를 의미하는 기둥이고 그 기둥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소한·대한·입춘·우수·경칩이 되고 동쪽 측면의 중앙칸 북쪽 기둥은 春分이 되며 다시 시계방향으로 청명·곡우·입하·소만·망종이 되어 남쪽의 중앙 칸 동쪽 기둥이 夏至가 되죠 다시 시계방향으로 돌아 소서·대서·입추·처서·백로 그리고 서쪽 측면 중앙 칸 남쪽 기둥은 秋分이 되고 다시 돌아 한로·상강·입동·소설·대설·동지 쪽에 이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24개의 기둥들은 각기 24절기로서의 의미가 있고 또한 24方의 의미도 갖고 있어요 건물 안쪽의 기둥들로 구성된 정면 5칸과 측면 3칸은 그 전체의 칸수가 12칸으로 되어 있는데요 이 12칸은 1년 12달을 의미하며 동북쪽 모서리칸이 正月이 되어 시계방향으로 三才의 의미, 즉 하늘·사람·땅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건물에 이렇게 다양한 의미를 담았다니, 조선시대 사람들도 운치가 있죠? 5 경복궁을 가장 멋지게 고치고 잘 활용했던 세종대왕 세종은 즉위 후 3년이 되던 해인 1421년부터 경복궁에 자주 가셨다고 합니다 1426년에는 집현전 문신들에게 궁내의 문과 다리 이름을 짓게 했다고 하네요 경복궁의 정문은 원래 이름이 오문이었는데, 예를 일으킨다는 의미로 弘禮門이라 이름을 지었구요 궁궐을 보호하는 궁성의 정문엔 빛이 사방을 덮고 가르침이 만방에 미친다는 의미로 光化門이라 하고, 근정문의 동쪽에 위치한 작은 문은 日華門이라고 했는데요 일화는 ‘해의 정화’를 뜻한다고 합니다 日은 음양의 이치 상 陽의 성격을 띠므로, 동쪽문의 이름으로 만들었데요 중국 당나라에서는 장안의 대명궁 선정전 앞에 있던 두 문 가운데 하나를 일화문으로, 다른 하나를 월화문으로 지었다고 하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이런걸 따라해야 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그래서 일화문의 반대쪽에 있는 작은 문의 이름도 역시 月華門으로 따라했습니다 제가 따로 언급을 안해서 그렇지 조선시대의 다양한 건축, 공예 작품들의 이름에 전거된 수많은 source들이 조선이 이상향으로 추종했던 고대 중국의 contents에서 왔습니다 이는 조선이 유교국가를 지향했고, 유교가 춘추전국시대 공자라는 인물을 시조로하고 있기 때문이죠 기독교, 불교도 마찬가지이지만, 유교도 원래 외국의 종교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조금 더 이야기하면! 경복궁의 동문은 동쪽이 봄을 의미한다는 의미로 建春門이라고 했고요, 서쪽은 가을을 환영한다는 의미인 迎秋門으로 명명했습니다 세종은 궁성 등 외곽을 마련하고 왕이 된지 9년째인 1427년에 경복궁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1426년에 근정전을 수리하고, 1427년에 동궁을 창건, 1428년에 건춘문을 고치고, 1429년에 경회루 및 사정전을 중수, 1430년에 강녕전을 수리하고 북문인 신무문을 신설하여, 궁성4문 체제를 완성했어요 같은 해 천문관측대인 간의대를 경복궁 서북쪽 모퉁이에 세우고 1434년 4월에는 홍례문 밖에 있는 회랑인 동서랑을 의정부육조 및 각사가 入直하고 待朝하는 곳, 즉 업무를 보는 곳으로 리모델링했고, 같은 해 8월에는 자격루라는 물시계를 설치했던 전각인 보루각을 세웠어요 1438년에는 강녕전 서쪽에 천체 운행을 관측하는 흠경각을 세우고요 여기서 잠깐! 세종대왕이 천문관측대인 간의대, 물시계인 자격루, 천체 운행을 관측하는 흠경각을 세운건 왜일까 짐작가시나요? 기상관측과 과학을 좋아해서 일까요? 흠흠흠흠 흠흠흠흠 흠흠흠흠 흠흠흠흠 흠흠흠흠 흠흠흠흠 조선은 중심 사상이 유교인 국가이지만, 중심 산업은 농업이었죠 농업은 날씨 기후 계절과 관련이 많지 않습니까? 비가 얼마나 오느냐에 따라, 얼마나 춥고 얼마나 덥냐에 따라 그 해의 수확량이 결정되잖아요 세종은 조선의 중심 산업인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하늘에 기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한 것이죠 세종은 언제나 다시봐도 참 열심히 사신 왕이셨던거 같아요 자 다시 돌아가서 세종25년인 1443년에는 훈민정음 창제 후 서적의 편찬과 인쇄를 담당하는 기관인 언문청을 설치하셨데요 또한 궁중 내 제사를 정리하면서 선왕 및 선후의 영정을 봉안한 진전인 선원전을 문소전 동북쪽에 옮겨 지었어요 같은 해에 교태전 등을 후궁영역에 건립하기도 하셨구요 경복궁의 후원은 조선 2대 왕인 정종 때 상림원이라 불리어져서 새와 꽃을 길렀으나, 세종이 모두 민간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하네요 상림원이 있던 자리는 세종 이후에 다시 후원으로 가꿔졌다고 합니다 상림원이 있던 자리가 지금의 청와대입니다 언급된 건물 말고도 경복궁에는 수많은 건물들이 계속 지어졌는데요 세종 이후 세조, 예종, 성종, 중종까지 수리, 증축, 개축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6 명종대의 소실과 복원 조선 11대 왕인 중종 때 불탄 동궁을 짓기 위하여 공사를 하던 중 명종8년인 1553년 9월13일에 화재가 일어났는데 남으로는 사정전 남랑, 동으로는 강녕전 외동랑, 북으로는 청연루 남월랑, 서북으로는 함원전 영태문, 북으로는 교태전, 서남으로는 경회문 등이 밤새도록 불에 타서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만 남게 되었다고 해요 궁궐의 엄청난 대화재였네요 이후, 군인과 승도 2200명과 대가를 받고 일하는 사람 1500명을 동원해서 370여칸이 다시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7 임진왜란에 의한 소실 왕실과 관료들이 피난을 떠난 빈 궁궐을 우리 백성들이 불태우고 보물을 약탈하였다 선조실록과 유성룡의 서애집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하네요 많은 분들이 경복궁에 왜군이 불을 질렀다고 알고 계신데요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거 같아요 1592년, 임진왜란으로 왜군이 한성에 입성했을 때, 선조가 도망치고 남아있던 경복궁은 불에 타기는커녕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겨질 만큼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라서 왜군으로 종군나온 왜승으로 하여금 놀라움과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는 기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아름다운 건축을 왕이 수도를 버리고 떠난 것이 화가 난 백성들이었는지, 조선을 침략한 왜군들이었는지는 지금도 아리송하다고 합니다 8 조선을 다시금 일으켜 세우고자 했던 흥선대원군의 노력이 담긴 경복궁 임진왜란 대화재 이후 270여 년 동안 경복궁은 복원되지 못했어요 복원이 기획되기는 했지만, 국가 재정상 추진을 못했다고 하는데요 경복궁터가 길하지 못하다는 풍수적인 믿음도 있었다고 하네요 광해군은 창덕궁, 창경궁, 인경궁, 훗날의 경희궁인 경덕궁을 창건하면서 경복궁은 중건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흥선대원군에 의한 경복궁 중건이 실행에 옮겨져 복원된 것이죠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와 부패정치로 권위를 잃어가던 조선왕실을 다시 세우고자 노력했는데요 경복궁이라는 법궁을 다시 복원하는 건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는 작업을 공간적으로 보여주는 대규모 사업이었죠 경복궁 복원은 1865년 4월에 시작하여 1868년 7월에 완성되었는데요 원납전을 징수하여 공사비를 모았고 자진하여 부역하는 백성들과 함께 경복궁을 중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든 공사라는게 순조롭지만은 않잖아요? 공사를 시작한지 1년만에 목재장에 화재가 발생해서 문제가 발생했고요 성격화끈한 흥선대원군은 전국 각지에서 목재와 석재를 모으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않고 모두 끌어왔답니다 나중에는 자금난이 심해져 원납전을 받고 벼슬을 팔기도 하고 한양 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당백전이라는 세금을 받기도 해서 원성이 점점 높아졌다고 해요 나중에 이 원성이 결국 흥선대원군이 몰락하는 원인이 되었지요 9 한강의 기적으로 일어선 대한민국의 상징, 경복궁 하지만 이렇게 힘들게 복원된지 몇십년만에 경복궁은 다시금 대규모로 훼손됩니다 국권을 일본에 빼앗기게 된 것이죠 일제강점기 이후 경복궁은 많은 건물이 훼손되고 박람회장 등으로 활용되면서 그 위용을 다시 잃어갔어요 또한 조선총독부가 들어서게 되어, 나라를 잃은 아픔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소가 되기도 했지요 경복궁은 해방이후에도 수십년동안 원래의 모습을 되찾지 못했습니다 나라가 워낙 못살았잖아요 대한민국은 다행히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활용되던 조선총독부건물을 철거하느냐 마느냐 다양한 논의를 거쳐서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추진해 흥례문 일원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했으며, 2010년에는 광화문이 원형 복원되었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복원되고 있는데, 2045년까지 계속 진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식민정치가 훼손한 궁궐터에 다시 복원된 현재의 경복궁은 한강의 기적으로 일어선 대한민국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