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안녕(Yoon Kwangjune Harmonica Story)

뜨거운 안녕(Yoon Kwangjune Harmonica Story)

#윤광준의하모니카이야기 #앙상블준 (010-5240-3296) # 하모니카 개인래슨 및 그룹, 출장 강의 (분산화음, 분산베이스, 하모니카 교습기, 악기수리, 조율 교육) 반주악보 필요하신분 연락주세요 "본 연주는 스마트폰으로 녹음후 스테레오, 에코, 리버브등을 전혀 사용치 않고 노이즈만 제거한 하모니카 원음입니다 듣기에 따라서 불편하실 수도 있습니다 1960년대 초 미8군 무대에서 가수로 활동하던 쟈니리는1966년에 신세기레코드에서 독집 음반 '쟈니리 가요 앨범'을 발표하며 혜성처럼 등장하였습니다 " 1967년에 발표된 '뜨거운 안녕'은 당대 가수 '정 원', '트위스트 김'과 더불어 1960년대 극장 쇼의 인기 스타로 군림했던 '쟈니 리(본명 이영길 1937년생)'의 1966년에 발표된 대표곡입니다 이 노래가 발표되고 얼마 뒤, 인천에서 어느 연인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하여 동반자살을 하였는데, 유서(遺書) 대신 ‘뜨거운 안녕’ 가사를 적어놓고 숨을 거두어 세인(世人)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이 노래는 더욱 유명세를 탔습니다 당시로는 꿈의 수치인 35만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그 여세로 1967년에 후속음반을 발표하였으나, ‘뜨거운 안녕’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남아 그 벽을 넘지 못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훗날 가수 전인권이 불러 크게 히트한 ‘사노라면’의 오리지널 곡 ‘내일은 해가 뜬다’가 쟈니 리의 목소리로 그 음반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후일담은 차중락 최고의 히트곡인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쟈니 리가 부르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는 차중락에게 선뜻 양보하였다 합니다 그 역시 같은 병을 앓고 있었기에 상련을 느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만주에서 태어나 6·25때 단신으로 월남하여 고아원을 전전하며 삶을 이었던 소년 이영길 미국인 양아버지를 만나 미국에까지 가는 행운을 얻은 듯했으나, 쫓겨 와야만 했고, 쟈니 리라는 가수가 되기까지 우리의 현대사와 궤를 같이하는 질곡의 생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 잡초와 같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팔순을 넘긴 지금도 그는 무대를 뜨겁게 달구고 있고 최근에는 MBC 복면가왕으로 등극하여 가요계 전설의 진면목을 보였으며, '바보사랑'이란 신곡을 발표하여 노익장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1997년에 독일 출신의 가수 Nico가 랩퍼 XL Singleton와 함께 ‘Trot Pop’이란 타이틀의 앨범을 발매했는데, ‘Korean Dance Express’란 부제가 붙은 이 앨범은 제목에 드러나듯이 트로트 계열의 곡들을 편곡하여 여기에 랩까지 넣어 흥겨운 댄스곡처럼 느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 중 한 곡이 쟈니리의 '뜨거운 안녕' 이를 번안한 곡이 바로 Nico의 'Here I Am'입니다 뜨거운 안녕 백영진사 서은영곡 쟈니리 노래 또 다시 말해주오 사랑하고 있다고 별들이 다정히 손을 잡는 밤 기어이 가신다면 헤어집시다 아프게 마음 새긴 그 말 한마디 보내고 밤마다 울음이 나도 남자답게 말하리라 안녕이라고 뜨겁게 뜨겁게 안녕이라고 또 다시 말해주오 사랑하고 있다고 비둘기 나란히 구구 대는데 기어이 떠난다면 보내 드리리 너무도 깊이 맺힌 그 날밤 입술 긴긴 날 그리워 몸부림 쳐도 남자답게 말하리라 안녕이라고 뜨겁게 뜨겁게 안녕이라고 '또다시 말하리라 사랑하고 있다고 ~ 중략 ~안녕이라고' 어느 날 노래방에 갔다가 손자 같은 젊은이가 ‘뜨거운 안녕’을 부르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반가운 마음에 손짓을 했다 “쟈니 리 알아?” “모르는데요 ” “‘뜨거운 안녕’은 알아?” “그럼요 제 십팔번인데… ” “내가 이 노래 부른 가순데… ” “정말요?” 쟈니 리(본명 이영길)는 이 같은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제 이름은 이미 썩어 없어졌어요 ‘뜨거운 안녕’도 그랬을 것 같았는데 아직도 불려지니 얼마나 좋아요 정말 행복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1970년대에 남진-나훈아가 있었다면 1960년대에는 ‘뜨거운 안녕’의 쟈니 리와 ‘허무한 마음’의 정원이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당시 청춘들의 가슴을 휘저었습니다 1938년 만주에서 태어난 쟈니 리의 삶은 소설과 다름없습니다 어린 시절을 외갓집이 있던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보내다가 1950년 말 혈혈단신으로 부산까지 내려왔고 고아 신세가 되었습니다 쟈니라는 이름은 외국인 양아버지가 붙여준 것인데, 음악을 알게 해줬던 양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인종 차별을 겪었고, 호적이 없었던 탓에 불법 입국한 사실이 드러나 되돌아오게 됩니다 스무 살의 나이에 상경해 어렵사리 쇼극단에 들어가 가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극장쇼 무대는 정장을 입고, 부동자세로 노래를 불렀던 분위기인데, 쟈니 리는 정원과 함께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서양에서 유행하던 리듬 앤드 블루스나 로큰롤 번안곡을 부르며 무대를 헤집고 다녀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윤복희가 미니스커트 열풍을 몰고 왔다면, 앞서 쟈니 리는 청바지 문화를 선도했습니다 준수한 외모와 호소력 짙은 가창력, 세련된 스테이지 매너가 인기의 비결이죠 1966년부터 본격적으로 음반 취입을 한 그는 ‘뜨거운 안녕’, ‘내일은 해가 뜬다’ '통금 5분전'등을 발표합니다 “생활이 어려워 남대문 시장에서 다 떨어진 청바지를 사서 의상으로 입었던 것뿐인데 선배 가수들이 난리가 났었죠 허허허 정원과 제가 무대에 오르면 젊은 여성 팬들이 속옷을 던질 정도로 난리가 났어요 피카디리, 단성사, 대한극장, 국제극장, 국도극장 등에서 모두 쇼를 했었는데 저와 정원이 섭외 1순위였죠 그때 인기에 힘입어 ‘청춘대학’, ‘즐거운 청춘’ 등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고… ” 1992년 쟈니 브라더스의 김준과 함께 재즈풍 앨범을, 2005년 반야월 선생과 함께 트로트풍 앨범을 내는 등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간간이 앨범을 발표했으나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2006년 말 한국에 완전히 정착한 그가 발표한 미니 앨범의 머리곡은 ‘걱정마’입니다 록과 재즈 느낌이 동시에 나는 노래로 왕년에 키보이스에서 활동했던 윤항기 목사가 선물했습니다 아직도 노래에 대한 열정이 꿈틀댄다고 하는 그는 “우연히 들어봤는데 곡이 밝고 가사도 쉽고 저에게 맞는 것 같아 앨범을 내게 됐다 ”고 설명했습니다 그의 열정은 끝이 없습니다 “누가 곡을 준다면 하드록이나 헤비메탈도 부를 수 있다 ”고 하는 그는 그룹 사운드를 만들어 전국 투어를 해보는 게 남은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노익장’ 이야기를 꺼냈더니 “매사에 나이를 생각하면 자꾸 뒤로 처지고 주저앉게 되죠 어떤 사람들은 주책이라고 하겠지만, 마음을 젊게 하려고 아이들 옷을 입고 나가기도 해요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도전합니다 특히 노래는 저를 건강하게 하는 힘이죠 ”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인기가 허무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쟈니 리이지만, 꾸준히 노래 활동을 이어오지 못한 점에 아쉬움은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끝까지 했어야 했는데 왜 그랬을까 후회 많이 하죠 목소리가 나오는 그날까지 열심히, 무대에서 노래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