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교계브리핑 – 임시정부와 기독교의 관계 (황승영 기자) l CTS뉴스, 기독교뉴스, 교계뉴스

주간교계브리핑 – 임시정부와 기독교의 관계 (황승영 기자) l CTS뉴스, 기독교뉴스, 교계뉴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기독교 앵커: 주간 교계브리핑 시간입니다 올해는 3 1운동 100주년이자,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인데요 임시정부 형성과 수립 과정에서의 당시 기독교인의 활동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또 대한민국 임시헌장 그 중심에 기독교 신앙이 있었다는 사실도 들어나고 있습니다 앵커: 오늘 주간 교계브리핑시간에는 임시정부와 기독교와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스튜디오에 한국성결신문 황승영 기자가 나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황 기자, 3 1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된 후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가 출현했는데, 기독교가 임시정부 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 사실일까요? 황승영 기자-네 그렇습니다 1919년 3 1운동 직후 독립운동을 총괄할 수 있는 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는데요, 독립국이 되려면 정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독립 운동가들이 세 곳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합니다 3 1운동이 일어난 국내에선 서울에서 한성정부가, 그리고 해외 한인이 가장 많았던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가, 또 중국 상하이에서도 임시정부가 수립되는데요, 한성 정부는 감리교 이규갑 목사가 중심이었고, 이승만이 집정관 총재를 맡았습니다 이들은 민주제와 대의제를 실행해 온 기독교인들이었고, 민주공화제를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국내는 일본의 감시와 박해가 심해서 임시정부가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연해주 노령임시정부는 사회주의적 성격이 강했고, 그곳에도 일본 세력이 강해서 유지되기 힘들었다고 학자들의 주장합니다 그래서 국내에서도 가깝고, 일본 박해도 피하면서 미국과 연락하기 좋은 상해로 임시정부가 통합된 것입니다 통합정부가 된 상해정부는 한성정부를 그대로 계승한다고 해서 각료들도 한성정부의 각료들을 그대로 선임했습니다 그리니까 중요한 것은 상해정부는 상해한인교회를 중심으로 만들어졌고, 기독교 정신이 강했던 한성정부를 계승했다는 겁니다 결국 대한민국의 뿌리가 된 임시정부의 형성 과정은 기독교인 중심이었다고 해석해도 무방해 보입니다 앵커 - 상해 임시정부가 기독교인 중심이었다는 것이 놀라운데요, 좀더 구체적으로 짚어보면 좋겠습니다 먼저, 상해 임시정부가 세워질 때 상해한인교회 중심이었다고 했는데요,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황승영 기자 - 네, 당시 상해에는 기독교인 청년들이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었는데요, 유명한 신한청년단이었습니다 신한청년단 멤버 대부분이 상해한인교회의 신자였습니다 서울신대 박명수 교수에 따르면 신한청년단 창립 멤버 가운데 여운형과 선우혁은 당시 전도사였고요, 한진교는 회계 집사였고, 김철, 정덕수 조동호 등이 신자였습니다 신한청년단은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송했고,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일제 통치의 실상을 알리고, 독립시켜 줄 것을 요구하는 ‘독립청원서를 보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상해에서 독립운동가 들이 회합하고 모일 수 있었던 것은 1914년 설립된 상해한인교회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상해한인교회는 상해YMCA, 피치 선교사와 협력해서 상해 한인들을 규합하는 역할을 하고 미국 러시아 등 해외와 국내에 있는 독립지사의 연결고리를 하는 역할도 수행했다고 기독교사학자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한청년단을 중심으로 한 상해기독인들은 각처에서 몰려드는 사람과 함께 임시정부를 만들었던 겁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온 현순 목사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는데요, 그는 민족대표 33인 파송한 인물로 상해기독인과 임시정부를 만드는 실무 작업을 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앵커 - 새로운 나라가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하는가는 새 나라의 지도자가 누구인가가 중요한데요, 당시 임시정부의 최고 지도자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가장 많았다면서요? 황승영 기자 - 네 그렇습니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모여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헌법을 만들고, 주요 직책을 선출했는데요, 이 때 회의에 참석한 29명의 의원 가운데 기독교인이 11명에 달했습니다 이중 6명이 상해한인교회 신자였다고 합니다 임시의정원에는 대종교도 7명 참석했는데요, 당시 회의가 기독교적인 분위기와 대종교의 참여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가 출범했을 때에서 당시 최고 지도자였던 국무총리에는 이승만 박사가 선출되었고,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 총장에 김규식이 선임되었는데요 안창호는 나중에 미국 교포들의 헌금을 가지고 임시정부 건물을 얻고 월급을 주는 핵심역할을 했습니다 또 당시 의정원 부의장으로 손정도가 선출되었는데요, 그는 평남 강서 출신의 목사였습니다 의정원 제2대 의장과 각료를 지낸 그는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기초를 세우고 임시정부를 통합하는데 데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임시정부가 통합 이후에도 정부 요인 9명 중 6명이 기독교인었는데요,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안창호 등이 중심 인물로 활동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사실상 세 지도자를 중심으로 통합 임시정부의 출범이 가능했다는 의미에서 임시정부가 '삼각정부'라고도 불렸다“고 평가했습니다 사실상 임시정부의 역사는 기독교와 불가분의 관계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앵커 - 상해에서 만들어진 임시정부의 헌장, 그리니까 임시정부 헌법에 하나님이 등장하고 기독교 사상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면서요? 황승영 기자 - 네 그렇습니다 임시정부 헌장의 기독교적 사상을 있다고 주장하고 대표적인 학자는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박명수 교수입니다 박 교수는 임시정부와 기독교와 관련된 논문과 강연을 여러 차례 발표했데요, 최근 한국복음주의 월례발표회에서 그는 “헌장 전문에 ‘신인일치(神人一致)로 중외협응하여’라는 표현이 들어있는데, 이는 새 정부 수립에 대한 신앙적 표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하나가 되어 이루어진 나라라는 의미라는 것인데요, 기독교에서 이런 표현을 많이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임시헌장 7조에도 “대한민국은 신에 의사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진하여 인류의 문화와 화평에 공헌하기 위하여 국제연맹에 가입함”라고 나오는데요, 박 교수는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택하신 나라라는 것이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는 또한 “임시헌장에 붙어 발표된 선서문 마지막 문장에도 ‘신(神)의 국(國)의 건설(建設)의 귀(貴)한 기초(基礎)이니라’고 하여, 대한민국 건설이 하나님 나라 건설과 연결되고 있음을 말해준다”면서 “이는 대한민국은 지상의 한 국가가 아니라 앞으로 하나님이 세우실 우주의 하나님의 나라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앵커 - 대한민국 임시헌장에서 ‘하나님’이 등장한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인데, 헌장에서의 ‘신’이 기독교에 말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황승영 기자 - 네 일부 학자들은 임시헌장에 나오는 신(神)이라는 표현이 대종교를 중심으로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에 유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박명수 교수도 “그것은 헌장이라는 특징상 특정종교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종교를 포함하려는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동의를 하면서도 “이것은 동시에 기독교적인 성격이 강하고, 헌장 자체가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며 대종교 관련설은 부정적으로 봤습니다 박 교수는 그 근거로 먼저, 1919년 2월 대종교 출신 독립운동가들 중심으로 만주와 북경에서 작성된 독립선언서 마지막 부분에는 ‘황황일신(皇皇一神), 천인합응(天人合應), 상제(上帝) 등 대종교 및 중국적인 표현을 사용하는데 비해 헌장에서는 기독교에 가까운 신(神)이라는 표현을 택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해외교포들은 새로운 나라가 기독교적인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주장했는데, 대표적으로 이승만은 “새로 세워지는 나라는 예수교국가가 되어야 한다”말했습니다 또 미국 교포신문인 신한일보 1919년 6월 10일자에서는 ‘하나님의 뜻으로 ’라고 아예 한글로 바꾸어 보도했습니다 무엇보다 임시의정에 참여하고 있는 가장 많은 숫자의 인사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이었기 때문에 헌장의 ‘신’이라는 단어를 기독교 하나님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박 교수는 주장했습니다 앵커 - 우리나라 애국가에도 ‘하느님’이 등장하고, 제헌국회도 기도로 시작한 것을 봤을 때도, 대한민국 정부 제도에 기독교적 가치가 있는 게 분명하게 아닌가요? 황승영 기자 - 네 그렇습니다 상해 헌장은 ‘대의민주주와 공화제’를 천명했는데요, 이것은 대한민국 헌법 1조에도 명시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임시헌장에 앞서 1907년 제정된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에 먼저 대의제와 민주공화제를 천명하고 있습니다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교수는 “한국 장로교회는 1907년 교회를 이끄는 대표를 교인 중에서 선출한다는 내용의 헌법을 제정했다”며 “왕정에 이어 주권을 잃은 나라에 살면서도 대의민주주의 제도가 담긴 교회헌법을 가진 셈”이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임 교수는 “이런 점에서 ‘공화제’와 ‘대의민주주의’를 명시한 상하이 임시정부의 ‘임시헌장’과 장로교회 헌법은 ‘민주공화제’란 공통분모가 있다”며 “이것이 장로교 교인들이 독립을 위한 3·1운동과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적극 투신한 배경”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박명수 교수도 “민주주의는 상당 부분 기독교인들에 시작되고 발전되고 구체화됐는데, 이는 1924년 천도교 잡지 ‘개벽’에서 잘 나타난다”며 “이는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천도교인들까지 민주주의가 기독교에서 유래했음을 수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앵커 - 그렇군요 3 1운동 100년을 맞는 올해, 마치 숨겨놓은 사실들이 들어나듯 100년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독교인들의 활동들이 조명되고 있는 듯 한데요 근대 역사속에서의 기독교의 가치와 역할이 이번 기회를 통해 바로 알려지고, 또 그러한 정신들이 한국교회는 물론 우리 다음세대에게 올바르게 전해질 수 있길 기대해 봐야 하겠습니다 황승영 기자 오늘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