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아는 다산 정약용 유배생활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약력과 18년 유배생활 한 곳을 찾아보았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님은 1762년(영조 38년) 마현(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5남 3녀 가운데 아버지 정재원, 어머니 해남 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실학자 이익의 책을 통하여 실학을 배웠으며, 22세에 문과에 장원급제 한 후, 정조대왕이 만든 규장각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수원화성을 건설할 때 거중기를 개발해 공사기간을 대폭 줄엿고, 정조의 화성 행차 시 배다리를 설계해 한강을 건너게 했다 이렇게 선진 기술과 새로운 사상에 관심 많았던 그는 정조의 남자라 불릴 만큼 깊은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1801(순조1년)에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로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게된다 유배생활중에는 18제자와 함께 학문을 정리하고 실학을 집대성해 최고의 실학자이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중앙 정치 제도의 개혁방안을 담은 경세유표, 공정한 사법제도의 개혁방안을 담은 흠흠심서, 지방 정치제도의 개혁안을 담은 목민심서가 있다 정약용은 1836년(헌종2) 75세의 일기로 고향집에서 세상을 떠나기까지, 평생 500여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과 2,700여 수의 시를 남겼다 다산 정약용 선생님은 유배지인 강진에 도착했을 때는 매우 추운 겨울이었으나, 대역죄인이라 여겨 유배 온 사람을 따뜻하게 맞아줄 사람들은 없었으나, 그곳 동문매반가의 주모만 정약용을 불쌍히 여겨 챙겨주었습니다 정약용은 자신이 거처하는 누추한 방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이고 ‘네 가지 마땅함’ 즉 “생각은 맑아야, 용모는 장엄해야, 말은 과묵해야, 행동은 중후해야 한다”는 다짐을 하면서 더욱 학문에 열중하였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1805년 봄에 강진에 있는 백련사에 들러 혜장 스님을 알게 되면서 인연을 맺고, 학식이 높았던 혜장은 다산을 존경하여 자주 찾아왔고, 그가 머물고 있던 주막의 번잡함을 피해 백련사 말사인 고성암 별채의 보은산방에 거처하게 하였습니다 다산이 본격적으로 보은산방에 거처했던 것은 큰아들 학연이 찾아온 1805년 겨울이었다 다산은 이곳에서 겨울을 나며 아들에게 주역, 예기를 가르쳤다 선생은 1808년 봄 외가인 해남 윤 씨 집안에 놀러갔다 아늑하고 조용하고 경치가 아름다운 다산초당으로 거쳐를 옮기게 됩니다 그곳으로부터 약 1키로 떨어진 곳에 백련사에 절친한 벗 혜장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정약용 선생은 비로소 안정을 찾고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에 몰두 했으며, 10년 동안 다산학단으로 일컬어지는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책을 집필했습니다 이곳 다산초당에는 3경이 있는데 찾아보시죠! 1경은 정석이라고 직접 돌에 새긴 것이고, 2경 약천은 직접 땅을 파 돌 틈에서 물이 솟아 나왔으며, 이 물을 떠다 3경인 다조에서 솔방울로 불을 지펴 차를 내렸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동암과 서암이 있는데, 동암은 책을 집필하였고, 서암은 제자들이 숙식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부터 뒤쪽 산으로 걸어 가면 오솔길이 있으며 약 1키로가면 백련사 그곳에는 혜장스님이 있어 두사람은 수시로 서로를 찾아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지으며 차를 즐기기도 했다는 오솔길이 있습니다 한번 걸어가 보시죠!! 다산초당에 가기전에 다산 박물관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유배 기간 동안 좌절하지 않고 역경을 기회로 바꾸었던 정약용은 “이제야 참다운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얻었구나!”라고 하면서 학문과 저술 활동에 열중했다 #정약용 #다산초당 #사의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