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이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3가지 전략.

처칠이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3가지 전략.

아래 블로그에 들어가시면 방송에서 다 설명하지 못한 처칠의 전략에 대해서 더 자세히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출간 26일만에 3쇄를 찍은 쉽고 쉬운 경제 상식 책 '홍선표 기자의 써먹는 경제상식'을 만나보세요 경제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31가지 주제만을 다룹니다 (예스24) (알라딘) (교보문고) (인터파크) (반디앤루니스) 제 블로그에 오시면 방송의 내용을 글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블로그) 팟캐스트로도 방송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팟캐스트)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경제경영 해설사 홍선표 기자입니다 오늘은 ‘처칠이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3가지 비결 그가 전쟁을 이끌게 되자마자 통계학자와 경제학자를 고용한 이유는?’이라는 제목으로 히틀러의 나치 독일을 제압하고 연합국의 승리를 만들어낸 윈스턴 처칠의 경영 전략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으신 분들이더라도 윈스턴 처칠이란 이름은 들어보셨을 텐데요 그에 대해 조금 더 알고 계신 분들이라면 항상 입에는 시가를 문 채 나비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으로 중절모를 쓰고 있는 처칠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실 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2차 세계대전 무렵의 역사에 대해 알고 계신 분들이라면 그가 수상이 돼서 전쟁을 지휘하기 시작했던 무렵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웨이, 폴란드 등 유럽 전역은 이미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해 점령을 받고 있었고, 오로지 바다 건너 영국만 홀로 남아외로운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오늘은 멸망 위기에 놓인 국가의 지도자가 돼서 5년 동안 수많은 위기를 겪어내며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처칠의 리더십과 경영 전략에 대해서 다뤄보겠습니다 처칠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뛰어난 작가였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면 많은 분들이 깜짝 놀라시는데요 아무래도 험상궂은 불독을 닮은 그의 외모가 노벨문학상 수상자에게 기대하는 지적인 이미지와는 들어맞지 않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집필했고 수십 년 동안 생활비의 대부분을 책을 팔아서 번 인세와 언론사에 칼럼을 기고하고 받은 원고료, 그리고 강연을 하고 받은 강연료로 마련했던 프로페셔널 작가였습니다 1953년 노벨상위원회는 그가 쓴 책들과 그가 전쟁 중에 했던 연설의 문학적 가치를 인정해 처칠에게 노벨 문학상을 주는데요 처칠이 2차 세계대전을 치러낸 자신의 경험을 정리해서 펴낸 모두 6권으로 이뤄진 ‘2차 세계대전’이 특히나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번 글 역시 그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밝혔던 그의 경험과 생각, 고민을 바탕으로 합니다 저는 이번에 ‘2차 세계대전’을 읽으며 그가 유럽의 대부분을 장악했던 히틀러의 나치 독일을 제압할 수 있었던 전략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추측과 감이 아닌 정확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조직 구성원들이 같은 기준에 따라 생각하고 같은 용어로 말하게 하라 둘째, 최고 경영자일수록 첨단 과학과 공학기술, 그리고 기술이 바꿀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고민해야 한다 셋째,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웃는 얼굴로 자신감에 찬 태도를 보이라 특히 당신이 리더라면 더더욱 더 그래야 한다 먼저 ‘추측과 감이 아닌 정확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첫 번째 전략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처칠은 전쟁이 터진지 나흘 뒤인 1939년 9월 5일 해군부 장관으로 임명되며 전쟁을 지휘할 영국 정부의 지도부에 합류합니다 (의원내각제인 영국에서는 의원들이 정부 내각의 각료, 즉 각 부처의 장관을 맡아 각 정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 그 이전 10여년 동안은 하원 의원이긴 했지만 정부 내각에서 각료(장관 등)로 일하지는 못했었습니다 거물급 정치인이긴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그저 수백 명의 의원 중 한 명에 불과했었습니다 사실 처칠은 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해군부 장관으로 일하며 수년 동안 영국 해군을 지휘한 경험을 갖고 있었습니다 1908년부터 1925년까지 해군부 장관을 비롯해 상무장관, 군수장관, 공군장관, 육군장관, 식민지부 장관, 재무장관 등 여러 직책을 거치며 화려한 경력과 풍부한 경험을 쌓아나갔습니다 그가 1940년 5월 수상 자리에 오르자마자 빠른 속도로 국내 정치 상황을 안정시키고, ‘덩케르크 철수 작전’ 같은 영국의 운명이 걸린 군사 작전을 단호하게 결정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경험 덕분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처칠은 ‘준비된 전쟁 지도자’와 같은 존재였던 건데요 하지만 전쟁이 터지기 전 약 15년 동안 그는 권력의 핵심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이 시기 동안은 정부 각료로 활동하지 못한 채 그저 한 명의 의원에 머물렀으니까요 전쟁이 터진 며칠 후에 임명된 해군부 장관직은 그가 약 15년 만에 다시 맡게 된 각료 자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긴박한 시기에 영국 해군을 책임지게 된 그가 장관직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장 해군 제독들을 불러 어떻게 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 전략을 논의했을까요? 아니면 직접 함대를 몰고 전선에 나가 독일군의 움직임을 눈으로 관찰했을까요? 해군 기지를 돌며 처칠 특유의 명연설로 해군 장병들의 사기를 끌어올렸을까요? 모두 아닙니다 처칠이 영국 해군을 이끌게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여섯 명의 통계학자와 경제학자를 고용한 일이었습니다 이들을 고용한 뒤에는 이들에게 모든 군사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처칠은 자신의 책에서 “해군부를 책임지고 전쟁내각 각료가 됨으로써 내가 해야 할 임무의 첫 단계는 나 자신의 전략 전문 팀을 만드는 것이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뽑은 통계학자와 경제학자에 대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