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bc울산방송] 2015_06_21 도심허파, '십리대숲' 언제부터

[ubc울산방송] 2015_06_21 도심허파, '십리대숲' 언제부터

태화강변의 십리대숲은 강변 산책로와 어우러져 많은 시민들로부터 사랑받는 도심 속 허파와 같은 곳인데요. 그런데 4kM가 넘는 이 거대한 대숲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아시는지요? 스토리텔링, 이영남 기자입니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대나무들이 강을 따라 숲을 이루는 곳. 바람이 불 때마다 댓잎은 푸른 파도처럼 일렁이고, 기분좋은 청량감을 줍니다. "일주일에 네번 정도 옵니다. 여기 왔다 가면 공해에서 벗어나는 맑은 느낌 자체가 머리에 스며드는 것 같아요." 10리, 4킬로미터에 걸쳐 울창한 대숲이 울창한 군락을 이룬다고 붙여진 십리대숲입니다. 전국적으로도 도심 한 가운데 이렇게 넓은 대숲이 산책로로 형성된 곳은 드문데 십리대숲은 언제부터 생겨난 걸까요? 태화강변에 조성된 십리대숲은 일제강점기 홍수를 막기 위해 심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얘깁니다. 그런데 대나무는 치수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제때 솎아주지 않으면 물길을 방해한다는 것. "대나무숲은 홍수에 유리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과거 농경지의 보호 차원에서 여름에 태풍에 대한 방풍, 모래가 날아오는 방사를 위해" 일제강점기에 심어진 것은 맞을까? 1912년 이후 지적도에는 한 일본인이 태화강변의 임야 12필지, 10만8천여 제곱미터를 대거 사들인 것으로 나옵니다. 황무지에 대나무를 심어 인근 농경지를 보호하고 다 자란 대나무는 죽제품 재료로 공급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원래 임야였기 때문에 대나무가 자생했다고 볼 수도 있고 이 사람이 집중매입하고 난 뒤 항공사진을 봤을 때 대숲이 훨씬 넓게 만들어진 것을 보면 경제적인 목적으로 대숲을 조성했다.." 그러나 대나무의 기원은 이보다 더 이전으로 올라갑니다. 12세기 김극기는 태화루 시에서 "대나무"를 묘사하고, 15세기 권근도 "해죽이 무성하다"고 기록했습니다. 1749년 발간된 울산의 읍지 '학성지'는 현재의 대숲 중심인 "내오산은 만회정 정자 앞에 대숲 몇묘, 즉 수백평이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적어도 300년 전부터 이미 태화강변에 오산대숲으로 불리던 대나무 군락이 자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1,2백평의 대밭이 있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금 십리대밭주변에는 대밭이 예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일제시대때 어떤 사람이 대밭을 조성했다면 홍수로 없어진 부분을 대나무를 식재해 보강했을 가능성..“ 자생적인 군락지에다 대나무를 보강하면서 대숲은 1954년에도 지금과 비슷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개발 논리에 밀려 숲은 잘려나갔고 1990년대 도시계획상 아파트 예정지역이 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숲을 지킨 것은 시민들의 힘이었고, 때마침 행정도 가세해 십리대숲은 울산의 명물이 됐습니다. 유비씨 뉴스 이영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