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될 것 같아도 안되고, 안될 것 같아도 잘되는 "열왕기하 11장 1~4절"
잘될 것 같아도 안되고, 안될 것 같아도 잘되는 • 잘될 것 같아도 안되고, 안될 것 같아도 잘되는 "열왕기하 11장 1... 👨💻 꼭두새벽묵상 No. 702 [열왕기하 11:1-3] 1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그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자손을 모두 멸절하였으나 2 요람 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빼내어 그와 그의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여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게 한지라 3 요아스가 그와 함께 여호와의 성전에 육 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가 나라를 다스렸더라 하루가 소요될 일도 아닌데 목요일 오후 3시 이후부터 시작하다보니 올해 여기 임기에 심어논 고구마 케는 작업이 결국 이틀이 된 셈이다. 올해는 두 곳에 걸쳐 30단을 넘게 심었다. 교회 밭 바로 밑에 예전에 한국전력 변전소 하던 자리에 11단을 심었는데 그곳에 심었던 고구마를 모두 켄 것이다. 말이 밭이지 변전소자리였다 보니 시멘트 폐기물과 크고작은 자갈로 이루어진 돌밭이다. 고구마가 든 것은 그다지 많은 것은 같지 않는데 굵기는 장난이 아니게 굵다. 돌밭에 심으면 흙이 얕으므로 자라다가 타서 말라버린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건 성경 말씀에 반하는 고구마이다 또 한곳 금번 여름에 봉화읍내 해저리에 사택과 예배당을 지었던 그 현장의 밭에 20단을 심었다. 그곳은 심을 때 느낌이 좋았다. 여기는 변전소 자리 돌밭에 심었던 것과는 달리 아마도 정말 잘될 것이다 이런 느낌... 하지만 결과는 정말 잘될 것 같다는 생각했던 그곳은 꽝이다. 고구마 굵기도 그렇고 심은 양도 배나 많은데.... 그곳에 있는 고구마 형제 자매들은 당췌 자라지도 않았고, 양도 별로 없다. 그렇다고 멧돼지가 와서 케 먹은 흔적도 없다. 농사법의 차이일까? 토질의 차이일까? 한 가지 다른 것은 여기 돌 밭에는 고구마 골에 비닐을 깐 것이고 해저리 고구마밭에는 비닐을 깔지 않았기에 풀 반, 고구마순반이었다. 또 여기는 내가 자주 가볼 수 있는 가까운 곳이고 해저리는 자주 못가는 먼 곳이다. 가장 큰 원인이 뭘까? 멀리 있어서 관심이 덜 가서? 아니 그것보다는 고구마 골 사이에 비닐을 깔지 않아서 풀반 고구마반이라서 그럴 확률과 이미 그 밭에는 몇 년에 걸쳐 나와 비슷한 게으른 농부가 농사를 짓다보니 풀씨를 너무 많이 받았기에 그런 것 같다. 땅으로 보았을 때는 분명히 그곳이 잘될 것 같다는 필이 왔는데.... 실제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다른 현상이 나왔다. 일단 여기는 돌밭이라도 겉으로 보이는 고구마 순이 너무도 풍성했고, 해저리는 돌이 없고 웬지 잘 될 것 같은 그곳에는 풀 속에서 겨우 가녀린 고구마 순이 힘을 못내고 고구마의 세력이 풀의 기운에 눌려 있었다. 돌밭과 같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 고구마가 마냥 신기하다. 오늘 열왕기하 11장에는 정말 돌짝밭, 가시밭과 같은, 인생 자체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한 사람이 등장한다. 1절 말씀에 나오는 아하시야는 남유다의 6대왕이고 이 아하시야의 어머니는 아달랴인데 그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자손을 모두 멸절하고 만다. 사실 그 아들이 그 자손이 누구 자손인가? 자기의 아들들이고 자기의 손자들 아닌가? 자기 남편이 유다의 제5대 왕 여호람(요람)이고 아들 아하시야가 6대왕 자신은 자녀손들을 모두 다 죽이고 7대 왕으로 등극을 하고 만다. 하지만 자신과 남편 여호람사이에 난 딸이자 아하시야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야스를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 빼내어 그와 그의 유모를 자신의 침실에 숨겨 아달랴 어머니를 피해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게 했다. 이 요아스가 어찌보면 정말 척박한 땅에서 보기 좋게 자라난 고구마 순 같다. 할머니가 왕권에 욕심을 내어서 자신만 빼고 나머지 모든 왕자들 다 죽고 말았다. 자신도 정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지만 고모 여호세바에 의해 목숨을 부지하고 7살 때 유다의 제 8대 왕으로 등극을 해서 40년을 통치를 하게 된다. 이 과정에 하나님의 도우심은 여호세바라는 고모와 제사장 여호야다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일곱 살에 왕이 되었다는 것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결코 정치를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척박한 환경 돌짝 밭과 같은 환경이었지만 하나님이 고모를 딱 붙여 살려주시고, 제사장 여호야다를 통해서 나라를 다스릴 지혜를 주셨던 것이다. 분명 할머니에 의해 그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어린 왕자였지만.. 11:3절에 의하면 이 요아스는 여호와의 성전에서 6년을 숨어서 사는 거예요~~ 생각해보라 아이가 울기 마련이고 아이가 떠들기 마련인데 6년을 숨어 지낸다는 것은 입에다 청테이프를 붙이지 않고서는 어찌 그 어린 것이 숨어서 살 수가 있었을까? 할머니 아달랴에게 들켜서 진즉에 죽고 말았을 인생인데 하나님은 6년동안 숨어서 지낼 수 있게 해주신 것이다. 주 날개밑 내가 편안히 쉬네 밤깊고 비바람 몰아쳐도 아버지께서 날 지키시리니 거기서 평안히 쉬리로다. 주 날개밑 즐거워라 그 사랑 끊을 수 없네......... 하나님의 손길은 이 이런 요아스를 향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아들이 죽자 자신의 남은 다른 후손들을 모두 다 죽이고 왕이 된 할머니 아댤랴는 7년을 통치하고 1:20절에 왕궁에서 칼을 맞고 죽고 만다. 누가 봐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어린 왕자는 살게 되고 누가 봐도 장기 집권할 만한 아달랴는 7년의 통치 끝에 칼을 맞아 죽고 만다. 그래서 이 11장은 아달랴가 죽고 요아스가 즉위하는 그런 장면이 나오는 성경이다. 다시 1절로 돌아가 남유다의 아하시야가 예후에게 죽고 어머니 아달랴가 스스로 왕이 되었다. 자신의 아들들과 손자들을 모두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는데...정말 악독한 왕이었다. 그 왜그럴까? 아달랴의 어머니가 이세벨이다. 악독한 어머니 밑에서 악한 딸이 또 나온 것이다. 부모의 죄로 딸도 악을 행한 것이다. 저주가 내려오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가 없다. 자녀들은 부모가 하는 것을 보고 배우게 된다. 사람 마음속에 욕심이 들어가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거짓이 들어가도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피해를 보게 한다. 요한복음 8장에 거짓과 욕심의 아비가 마귀라고 하였다. 이 아달랴는 악령이 들어간 마귀, 사울과 같은 사람이었다. 사람 마음속에 악령이 들어가면 욕심이 들어가고 거짓이 생활화 되는 것이다. 욕심과 거짓을 내 쫒어야 한다. 감사하게도 아달랴의 딸 여호세바는 어머니를 닮지 않았다. 어찌 그럴까? 여호세바는 제사장 여호야다와 결혼하였기 때문이다. 남편을 잘 만나서 생각이 선하고 바른거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뀌는 것이다. 여호세바가 요아스를 살려내었다. 요아스는 이 때 갓난아기였다. 아무도 모르게 6년을 길러내었다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이다. 4절 일곱째 해애 여호야다가 사람들을 모아 왕자 요아스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12절을 보면 “여호야다가 왕자를 인도하여 내어 왕관을 씌우며 율법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매 무리가 박수하며 왕의 만세를 부르니라” 성전에서 즉위식을 제사장 여호야다에 의해 하게 된다. 다윗성이 성전 바로 아래에 있으므로 이 소리가 아달랴에게 들리게 되고, 16절 아달랴는 성전 밖에서 죽임 당한다. 악한 사람은 결국 심판 받기 마련.... 후에 제사장 여호야다가 섭정을 하게 되고 바알신당을 멸하고. 종교개혁을 일으긴다. 우리도 여호야다와 여호세바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다. 부모는 악을 행했는데 자녀는 그 가계에 내려오는 저주를 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던 것이다. 여호야다 여호세바 이들처럼 사는 동안 다른 사람을 축복해주는 그런 길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은 목숨 걸고 끊어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는 신앙생활 하면 저주가 끊기고 신명기 28장 1절14절에 나오는 축복의 삶이 열릴 것을 알아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고구마가 잘 자랄 것 같은 봉화읍내 그 밭과 같다고 할지라도 뚜껑을 열어보니 다르듯이 지금 믿음 있다고 하지만 환란을 겪어봐야 내가 믿음이 있는 지 없는 지 알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그런즉 누구든지 자랑하지 말지니라 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또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신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심은 주 안에서 자랑하게 하려 하심이다. 바울처럼 교회를 위한 염려와 애타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 만으로 족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한경을 탓하고 원망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려고 하지 말라 오늘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기는 자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