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광희문과 남은 160m[4K]. 나머지는?. Gwanghuimun, the remaining 160m of fortress walls. Where is the rest?](https://krtube.net/image/7jvsxFP4PRU.webp)
한양도성 광희문과 남은 160m[4K]. 나머지는?. Gwanghuimun, the remaining 160m of fortress walls. Where is the rest?
#한양도성 전 구간 18.627㎞ 중 도로나 #사유지 개발로 사라졌지만 도시 기능 유지를 위해 물리적 복원이 불가능한 부분은 5.127㎞다. Out of the entire 18.627km section of #Hanyangdoseong, 5.127km have disappeared due to road or private land development, but physical restoration is impossible to maintain urban functions. 한양도성은 일제 히로히토 황태자의 1907년 10월 서울 방문을 계기로 파괴되기 시작했다는 게 통설이다. 천황이 될 지엄한 몸이 보호국의 성문(숭례문) 아래를 지날 수 없다며 헐어냈다는 설이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콜레라가 기승을 부리자 히로히토를 보호한다고 호들갑을 피웠는데 숭례문 밖 #남지(南池)를 전염병의 온상으로 몰아 메워 버렸다. 고니가 유유히 노닐던 연못은 이때 사라졌다. 일제는 #사대문 중 산중에 있는 숙정문을 빼고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서대문)을 다 헐고자 했다.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대포를 쏴서 파괴하겠다고 하자 조선거류민단 단장 나카이 기타로가 임진왜란 당시 한양을 점령한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각각 입성한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전승 기념물이므로 후세에 남겨야 한다고 주장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식민 통치가 무르익었던 1925년에는 히로히토 결혼 기념 행사를 치를 장소를 만든다면서 흥인지문 양쪽 성곽과 청계천 수계 오간수문과 이간수문, 훈련도감과 하도감을 허물어 땅에 파묻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동대문디자인플라자)으로 옷을 갈아입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이다. 이간수문과 성곽은 복원됐다.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들춰 보면 진위가 의심스러운 대목이 등장한다. 1907년 3월 30일 참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권중현이 “동대문과 남대문, 두 대문은…사람들이 붐비고 거마가 몰려듭니다. 게다가 전차가 문 가운데로 관통하는데 피하기가 어려워 매양 전차와 부딪히는 경우가 많으니…문루의 좌우 성첩(성가퀴·城堞)을 각각 8칸 허물어 전차가 출입하는 선로를 만들게 하고 원래 정해진 문은 백성이 왕래하는 곳으로만 쓴다면 매우 번잡한 폐단은 없을 듯합니다”라고 고종에게 아뢰었다는 내용이다. 한양도성 성곽의 훼철은 일제의 강압이 아니라 우리 정책인 것처럼 적혀 있다. 사실이라면 성곽 철거는 백성의 통행 불편과 사고 예방 차원에서 각부 대신이 연명으로 건의해 고종의 재가를 얻어 시행됐다고 볼 수 있지만 여느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식민 시기에 집필, 편찬된 고종실록을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 히로히토의 방한과 도성 훼손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이완용이 총리대신에 취임한 이후인 ‘1907년 6월 24일 내부대신과 탁지부대신에게 동대문과 남대문의 성가퀴와 성벽 일부를 철거토록 통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를 맡을 ‘성벽처리위원회’가 7월 30일 내려진 ‘내각령 제1호’에 의해 구성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황태자’를 쓴 송우혜 작가는 언론에 기고한 칼럼에서 “성벽이 실제 철거된 것은 1908년 3월 중순으로 황태자가 서울을 다녀간 지 5개월이 지난 뒤였다”고 주장했다. 실제 성곽 철거 기사는 황성신문 1908년 3월 10일자와 대한매일신보 1908년 3월 12일자에 각각 실렸다. 일제에 대한 증오심 유발용으로 일본 황태자 원인설을 조작, 유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출처: https://munchon.tistory.com/588 [황보근영의 문촌수기:티스토리] #한양도성 #성돌 #축대 #담장 쌓은 #장충동 뒷길 서울 한양도성길 가운데 #광희문 에서 #장충체육관 까지 구간이 온전하지 않다. 이 구간은 성곽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끊어진 성곽을 찾아 헤메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성돌이 어딘가 있을 터인데, 찾아보면 어느 집 축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때론 호텔 스포츠시설에서 성곽이 사라졌을 땐 옛것을 찾는다는 게 부질없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오늘 탐방한 구간은 광희문에서 반얀트리 사이의 한양도성길이다. 광희문(光熙門)과 열결된 일부 구간은 복원되어 있다. 광희문은 한양도성의 동남쪽에 있는 문으로, 시체를 내보냈다 해서 시구문(屍口門) 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리웠다. 일제 시대에 일부 무너지고 1960년대에 퇴계로를 내면서 반쯤 헐렸던 것을 1975년 원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떨어진 현 위치에 중건했다. 광희문 근처에는 무당집들이 많아 신당리(神堂里)로 불렸는데, 갑오개혁 이후 신당리(新堂里)로 바뀌었고, 현재 신당동이 되었다. #장충동 으로 올라가면 #성곽 은 자취를 감춘다. 1930년대에 #동양척식주식회사 가 이 일대에 #문화주택 단지를 조성하면서 한양도성의 상당 부분을 훼손했으며 해방 후 1960~70년대에 신축된 주택들도 성벽을 파괴했다. 주택가를 들어가 보면, 주택의 #담장 이나 #축대 로 사용되고 있는 #성돌 이 눈에 띤다. 장충체육관에서부터 성곽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장충체육관 뒷길은 신라호텔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평지부의 석성은 대부분 세종 때 새로 쌓은 것인데, 옥수수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사용했으며. 상대적으로 큰 돌을 아랫부분에 놓아 균형을 유지했다. 이 형태의 성벽은 장충체육관 뒷길에서 잘 볼 수 있다. 성벽을 유심히 살펴보면 ‘생(生)’ 자 (천자문 42번째)와 ‘곤(崑)’ 자 (천자문 47번째)가 새겨진 각자성석(刻字城石)을 찾을 수 있다 이 구간의 성벽은 경상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쌓았다. 성곽은 옛 타워호텔인 반얀트리클럽 뒤편에서 끝이 난다. 출처 : 아틀라스뉴스(http://www.atlasnews.co.kr) 광희문은 태조 5년(1396) 도성 창건 때 동남쪽에 세운 소문이다. 광희문(光熙門, 영어: Gwanghuimun)의 '광희'는 "빛이 멀리까지 사방을 밝힌다(光明遠熙)"라는 데에서 유래했다. 광희문은 실질적인 도성의 남소문으로 이를 흔히 수구문으로 불렀다. 청계천이 흘러 나가는 곳에 세워진 수구가 거리상으로는 광희문보다는 동대문이 가깝지만, 남소문이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따로 있었기 때문에 편의상 수구문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수구문은 실제로는 시구문으로 이용되었으니, 서쪽의 서소문과 함께 도성 내의 장례행렬이 동쪽 방향으로 지날 때 통과하는 문이었다. 광희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문루가 망가졌다가 1975년 문을 남쪽으로 옮겨 문루와 함께 복원했다.(위키백과, #대한민국 #구석구석) #seouljatu #서울자뚜 #가볼만한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