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순의 서도소리 '소리의길' 놀량사거리 中 놀량(Hanmyungsoon Nolyang)
「놀량(서도)」은 서도입창으로 ‘놀량사거리’의 네 노래 중에 먼저 부르는 노래이다 ‘놀량사거리’는 18세기 이전에 발생하여 19세기 중반 현행 노래로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사당패의 주요 레퍼토리였다 ‘놀량사거리’는 놀량, 사거리, 중거리, 경발림으로 이어지는 네 곡이 하나의 큰 틀을 형성한다 봄이 되어 근거지를 나와 사당패가 산천경계를 유람삼아 떠도는 내용을 노래하고 있다 발림과 함께 소고를 들고 서서 노래하는 것이 특징이며 경쾌하고 발랄하다 서도의 ‘놀량사거리’는 노랫말의 내용이나 노래의 가락이 19세기 중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우리 민속악에서 살아있는 화석같은 존재라 평가되고 있다 ‘놀량’은 ‘놀다’에서 파생된 말 ‘놀아난다’는 뜻이다 ‘한 바탕 놀아보세’ 식으로 놀이판의 시작에서 부르는 소리이다 1916년 발행된 『조선잡가집』 ‘놀량’편에 “죠선에셔 뎨일 오래고 쳐음 된 노래라”말이 특별히 삽입된 것으로 보아 ‘놀량’은 그 연원이 상당히 오래인 것을 알 수 있다 ‘놀량사거리’는 팔도의 사당패나 놀량패들이 즐겨 불렸던 으뜸가는 레퍼토리였다 이창배는 『한국가창대계』에서 “서도의 놀량사거리와 남도의 화초사거리는 모두 서울 놀량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며 또한 “서도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경발림은 서울의 잦은 산타령 즉 도라지 타령만 이름을 바꾸어 경발림이라 한 데 불과하다”고 하면서, 그 근거로 “이는 서울 산타령의 시조인 의택이 제자인 종대와 더불어 금수강산으로 이름높은 평양에 가서 달 밝은 밤에 부벽루에 올라 굽이치는 대동강을 바라보며 목청 좋게 ‘놀량’과 산타령을 불렀다 한다 이에 본래 서도의 명창인 허덕선과 김방울이 이를 듣고 모방하여 지금의 ‘놀량’이 된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창배의 이러한 진술로 인해 그 후 상당히 오랫동안 ‘경기산타령’이 산타령의 원조라는 인식이 강하게 국악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창배의 주장은 신빙성이 전혀 없다 20세기 초반에 발행된 여러 잡가집을 보면, ‘판염불, 앞산타령, 뒷산타령, 자진산타령’의 계열과, ‘놀량, 사거리, 중거리, 경발림’의 순으로 나오는 계열, 두 가지가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판염불 계열이 현행 ‘경기산타령’이며, ‘놀량’ 계열이 현행 서도의 ‘놀량사거리’이다 즉 20세기 초반에도 이미 다른 두 계열의 입창이 동시에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1870년에서 1873년 사이에 만들어진 신재효본 『박타령(흥보가)』와 『변강쇠가』에 ‘놀량’의 연희방식과 노랫말이 일부 보인다 다음은 신재효본 『박타령』의 한 대목이다 “소사(小寺) 문안이요, 소사 등은, 경기 안성 청룡사(靑龍寺)와, 영남 하동 목골이며, 전라도로 의론하면, 함열에 성불암(成佛菴), 창평에 대주암, 담양 옥천 정읍 동복, 함평에 월량사, 여기 저기 있삽다가, 근래 흉년에 살 수 없어, 강남으로 갔삽더니, 강남 황제 분부 내어, 네 나라 박놀보가, 삼국에 유명한 부자라니, 박통 타고 그리 가서, 수천 냥을 뜯어내되, 만일 적게 주거들랑, 다시 와서 아뢰어라 분부 모시고 나왔으니, 후히 차하하옵소서 놀보가 하릴없어, 제 손수 눅이겄다 나오던 중 상(上)이로다 너희들 장기대로, 염불이나 잘하여라 사당의 거사 좋아라고, 거사들은 소고 치고, 사당의 절차대로, 연계사당이 먼저 나서, 발림을 곱게 하고, 산천초목이 다 성림한데, 구경 가기 즐겁도다 어야여 장송은 낙락, 기러기 훨훨, 낙락장송이 다 떨어진다 성황당 어리궁 뻐꾸기야, 이 산으로 가며 어리궁 뻐꾹, 저 산으로 가며 어리궁 뻐꾹 ” 이 인용에서 밑줄 친 부분이 19세기 중반에 불렀던 ‘놀량’의 실제 노랫말이다 황해도 봉산탈춤 제 3과장 사당춤에도 사당패가 등장해 ‘놀량’을 부르는 장면이 있다 이 노랫말들은 서도의 ‘놀량’과 흡사하다 때문에 서도의 ‘놀량’이 ‘경기산타령’보다 더 고형(古形)이며 원형(原形)의 ‘놀량’에 가깝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신현남은 『산타령연구』에서 “경기 놀량과 앞산타령은 서도 놀량과 사거리의 선율을 차용했으며, 경기 산타령은 서도 경발림의 선율을 상당부분 가져왔음”을 밝히고 있다 신현남은 같은 책에서 “사설부분에서 경기 산타령이 서도 산타령을 차용하였듯이 음악에 있어서도 경기가 서도의 것을 가져다 보다 복잡하고 불규칙한 전문성을 요하는 음악으로 만든 것”으로 결론짓는다 사당패는 예로부터 염불로 판을 벌였는데 그것이 ‘판염불’이다 ‘판’은 ‘놀이를 벌이다’의 뜻이다 즉 염불로 판을 벌이고 그다음에 ‘놀량’이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었으나 후대에 오면서 앞의 염불 형식은 사라지고, 후대에 ‘놀량’ 혹은 ‘산타령’만 남은 것이다 이 사당패가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서울 지역의 오강 칠패2) 지역에서 판놀음(놀량) 공연을 했고, 이들의 후예 혹은 서울 지방의 붙박이 예인이나 전문 소리꾼들이 이것을 전승한 것이 ‘경기산타령’이 되었다 이들이 곧 선소리패다 한편 서도의 ‘놀량사거리’는 고종 때의 사람인 허덕선, 김관준 등을 거쳐 최순경, 김종조, 김칠성 등으로 이어졌다 김칠성은 김정연에게 ‘놀량사거리’를 가르쳐서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서도의 ‘놀량사거리’나 ‘경기산타령’ 등의 입창은 모두 19세기 중반 이전에 사당패(혹은 놀량패)에서 시작된 ‘놀량’에서 파생된 것으로, ‘놀량’의 담당층이 사당패에서 정착한 선소리패로 바뀌는 것은 1870년대 이후이다 이때부터 서도 쪽의 ‘놀량사거리’와 서울 쪽의 ‘경기산타령’으로 분화가 일어났다 20세기 초에는 ‘놀량사거리’ 계열의 평양날탕패가 협률사를 무대로 서울에서도 ‘놀량사거리’를 공연하였고, 대중의 인기를 얻어 1930년대 음반에는 서도의 ‘놀량사거리’가 많이 남아 있다 ‘놀량사거리’는 오랜 세월 동안 기층 민중들에 의해 여러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우리 민족 문화의 중요한 무형 자산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놀량(서도) (창악집성, 2011 07 04 , 하응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