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주함] 돌아온 한명(눅 17:11-17/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성령강림일 후 열여덟째 주일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눅 17:11-17 “나병 환자 열 명이 치료받았지만, 돌아와 감사한 것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 오늘 복음서 말씀의 내용입니다 이 본문은 ‘감사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감사라는 주제에서 한 발 더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짧은 복음서 말씀엔 감사라는 주제만큼이나 특별하게 새겨야 할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 언급된 나병 환자 열 명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멀찍이 떨어져 “예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눅 17:13)라며 힘을 다해 외칩니다 이것은 절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온 힘을 다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짜낸 것인데요 여기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이 그런 “존재의 용기”로 사람들의 눈총을 뚫고 예수 앞에 나옵니다 그리고는 ‘불쌍히 여겨 달라’고, ‘치료해 달라’고 소리칩니다 누가복음 17:14의 구절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치료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기 어렵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수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로 따라서 했더니 가던 길에 완치되었다는 것만 확실합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돌아온 한 명에 온 관심을 쏟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라는 게 핵심입니다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의 율법 명령에 따라 유대인 제사장에게 갈 이유가 없습니다 가봤자 거기서 쫓겨날 게 뻔하기 때문이지요 아마, 이 사람은 마지못해 아홉과 같은 길을 가면서도 자기에겐 갈 곳이 없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하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가기는 가는데 맘에도 내키지 않고, 가봤자 상처만 받게 될 그런 길을 걸어갔던 것이지요 그런데도 이 사람은 왜 그 길을 갔을까요? 제 생각에 두 가지가 이 사람의 걸음을 이끌었다고 여겨집니다 첫째는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 두 번째는 아픔을 함께 나누던 동료에 대한 연대의식, 이것입니다 가기 싫지만, 이 두 가지 생각이 그를 사로잡고 이 길을 걷게 만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기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잊고 싶지 않은 귀한 묵상 주제 하나를 보게 됩니다 저 열 명은 힘없고 약할 땐 모두 내밀하게 연결된 공동체였습니다 출신성분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열 명은 힘을 합쳐 살려달라고, 고쳐달라고 큰소리를 내며 군중 속으로 용기있게 달려갑니다 그런데 낫자마자 구분선이 다시 생겨버립니다 누구는 유대인, 누구는 사마리아인…… 힘없을 땐 서로 격려하며 하나였던 사람들이 몸이 멀쩡해지자 매정하게 관계를 끊고 제이익을 찾아 떠나버립니다 의리나 정 같은 건 아무 소용없습니다 붕어 같은 우리 본성을 폭로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합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나도 몸이 아플 때만, 억울하고 기분 안 좋을 때만, 내가 손해 보았을 때만, 도움이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고, 나 어려울 때만 친구, 의리, 사랑 찾다가 상황이 좀 나아지면 제 갈 길 찾아가는 얍삽한 아홉 명 중 하나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깊이 돌아볼 일입니다 누가복음의 목표는 한 장면을 뚜렷하게 만드는데, 그것은 바로 18~19절 말씀입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누가복음 17:18-19) 오늘 이 본문을 읽으면서 누가복음이 기록되었던 1세기 상황으로 돌아가 봅니다 1세기만 해도 유대교와 기독교는 서로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유사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종교였습니다 그러니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하면서도 유대인의 율법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을 따를 것인지 모호하던 시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길이 모호하던 시절, 누가복음은 방금 읽은 이 구절을 통해 ‘예수가 바로 우리의 찬송과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다’라고 과감히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 통해 우리가 신뢰할 수 없는 세상, 기댈 곳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는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으로 오늘을 살아낼 힘과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이 말씀은 1세기 교인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전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치유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희망과 용기의 방향입니다 누가복음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우리에게 설명하고, 예수님의 입을 통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언합니다 세상 가장 막다른 곳에 다다를 때,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고 억울할 때라도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돌아온 사마리아인과 우리의 찬송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눅 10:25) 한 가지만 더 묵상하고 마칠까 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딱 두 번 나오는데, 오늘 함께 묵상한 누가복음 17장과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이 둘을 연결해서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 율법교사가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냐고 예수님께 묻자,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답해 주십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가르쳐 주셨는데, 거기서 사마리아인은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는 주인공으로 소개됩니다 이건 무척 도발적인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6:5절 말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계명에 ‘이웃 사랑’을 덧붙이면서 ‘이것이야말로 온 율법의 핵심’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온 율법의 핵심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모범으로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라고 사람 취급도 않던 사마리아 사람에게 찾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방인을 사랑으로 받아들인 예수의 복음 안에 있다면, 출신성분이나 자격 요건을 따지지 않고 서로를 향한 신뢰와 사랑의 길을 닦아나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을 통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사마리아인과 동일한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얻기 위해 한 마리의 양과 사라진 동전 한닢을 찾듯이 힘썼고(눅15장), 결국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찾아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런 식으로 늘 우리가 쌓아 놓은 경계 밖 이웃 한가운데서 발견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늘 불가능과 한계의 벽을 넘어 우리를 기다리고 기쁘게 맞아주시는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자녀가 되어 ‘교회’라는 이름으로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과 사랑은 어디에서 발견되어야 할까요?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이 교회 담장 안에서뿐 아니라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웃 한 가운데서도 발견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과 나눔- Q 본문에 언급된 나병 환자 열명이 예수님의 다른 기적이나 치유 사건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Q 오지 않은 아홉 명에 대해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그들이 예수님에게 돌아올 필요가 있었다고 여깁니까? Q ‘교회’라는 이름으로 한몸이 된 하나님의 자녀의 미음돠 사랑은 어디에서 발견되어야 할까요? 현재 루터란아워는 기독교한국루터회의 후원과 동역으로 CBS 표준FM에서 매일 오전 5시에 송출되고 있는 '날마다 주님과 함께'의 주일 라디오 설교에 참여함으로써 역사가 오랜 방송 선교 활동을 작게나마 지속하고 있습니다 루터란아워는 언제 어디서나 '당신과 한국교회를 위한 시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찾고 또 헌신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사랑과 기도, 그리고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후원 계좌 : 국민은행 098937-04-006221 [예금주: 한국루터란아워] #존재의용기 #오직예수 #동료 #이웃 #날마다주님과함께 #CBS #중앙루터교회 #최주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