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24.12.22 속죄의 혜택(히브리서 9:11-14)
속죄의 혜택 2024년 12월 22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9: 11-14 (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옛언약에 대한 부정은 그 옛언약이 창조에 속했고 그래서 또한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을 제조해 낸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취지에 대해서는 새언약까지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창조에 속했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일절 안 받습니다 하지만 그 취지는 완성해야 하기에 이 완성을 위해 하늘에게 누군가가 오십니다 하지만 그 오시는 방식이 과격합니다 자연스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단절’되어 있는 관계임을 분명히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막 1:10) ‘하늘의 찢으짐’을 동반해서 성령이 임해야 한다는 말은 앞으로의 예수님의 활동성이 과격함을 나타냅니다 즉 예수님의 모든 활동과 말씀에 대해서 이 땅에 속한 사람은 아무도 알아먹지 못합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요 3:21-22) 땅에 사는 자들은 안일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대체로 건전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자기가 그동안 꾸려온 인생에 대해서는 이 건전함을 유지하는데 있어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들은 하늘과 땅이 꽉 막혀 있고 단절되어 있음을 전혀 모릅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굳이 내려오셔야 하는 지를 그들을 모릅니다 당연히 노아의 물 심판과 장차 온 세상의 불 심판의 이유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과 말씀은 인간들로 하여금 이 안일함이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더럽고 추잡은 모습인 것을 말ㅇ해주십니다 마태복음 7: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여기 나오는 ‘개와 돼지’가 어떻게 가축보고 하는 말이겠습니까 사람들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이런 욕설을 들어야 하는지 이유조차 모릅니다 최고의 쌍욕은 바로 ‘속죄’입니다 이 속죄작업을 위해 인간들은 철저하게 죄인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심사와 뜻은 속죄의 본질에 손상이 가지 않겠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신 이유는 이 속죄작업을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출생부터 끝까지 ‘제대로 된 죽음을 위해’ 사셨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를 위해’삽니다 그래놓고도 자신을 건전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속죄작업의 과격함은 옛언약에 속한 성소의 존재에서도 거침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전뜰에서 제단이 있는데 이 제단의 불 위에서 제물들은 한 줌의 재가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개·돼지 정도로 대우 받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시체로 취급받아야 합니다 단순히 창조에 속했다고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겁니다 속죄작업이 시작은 바로 제단불에 의해 한 줌의 재가 된 것들을 쇠꼬챙이와 부삽을 가지고 긁어내는 일입니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파괴시켜버리는 겁니다 더럽고 추잡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그동안 인간이 살려고 마련한 모든 기반 자체가 무효라는 겁니다 가정, 직장, 각가지 모임 및 교회까지도 모두 더럽고 추잡스럽니다 하나님의 깨끗함에 도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용납할 수준이 못됩니다 이 더러운 수준의 시작은 “차라니 너는 태어나지 낳았더면 그게 나에게 나은 사정이었다”고 해당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멸절시키려는 것만이 아닙니다 성막이 있습니다 이 성막 안에서는 죄를 의로 바꾸는 작업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이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 예가 마가복음 8:22-26에 나옵니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이 소경을 눈을 뜨게 하시는 작업을 통해 일단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단절을 분명히 하십니다 침을 뱉는다는 것은 하늘의 침이 그 소경에게 묻혔다는 말입니다 이 단절로 인해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눈 뜨게 된 자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죄와 속죄를 아는 이가 없다는 겁니다 소경을 다시 안수하매 비로소 만물이 보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안목으로 장착된 자가 된 겁니다 단순히 시각적 장애 이전으로 되돌아 간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소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1-3) 이 대목을 통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알게 된 자가 아니라면 모두가 땅의 일만 아는 소경이라는 말입니다 즉 자신이 얼마나 추잡고 더러운 존재인지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일체 하나님께서 ‘인간의 손으로 한 일’과 ‘창조에 속한 것’을 받지 않은지 그 이유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소경 사건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9:17-18에 나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즉 사울이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그 어떤 한계로 넘어버린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도리어 핍박한 자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그 선 너머까지 오셔서 사울의 눈에서 비늘을 벗겨납니다 그래서 등장한 안목이 바로 에베소서 1:18-19에 나옵니다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창세 전의 내용까지 성령을 통해 알게 된다는 겁니다 이제 성도의 남은 삶은 이 세상 자체가 여전히 예수님을 시험한 악마의 마당인 것을 알고 일상을 통해서 자신의 죄가 예수님의 속죄작업으로 인해 의가 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들로 차고 넘치게 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속죄작업을 나타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