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22.05.15 중보자의 모형(욥기 42:7-9)
중보자의 모형 2022년 5월 15일 본문 말씀: 욥기 42:7-9 (42: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42:8)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42: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엘리바스, 소발, 빌닷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노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노하심은 욥을 뚜렷하게 부각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점에서 욥이 친구들에게 결코 으시댈 수 있는 입장이 못됩니다 욥을 승자로, 세 친구는 패배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들 세상관에서 그 어느 누구도 중보자의 기능을 생겨날 수없음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욥이나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에게 철저하게 활용당했습니다 그들의 입을 통해서 그들의 본심을 유감없이 드러내게 했습니다 문제는 친구들이 평소에 하나님에 대해 자기 의견을 솔직하게 다 까발릴 것은 인간들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태가 욥의 몸을 통해서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욥이 받은 고난은 평소에 인간들이 예상하는 죄와 벌 사이의 안배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욥의 행위에 비해서 너무 과도한 징벌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의 친구들은 그 지독한 벌에 합당한 죄를 욥에게는 찾아내려고 억지를 부리게 됩니다 그리고 욥은 극구 그런 정도의 죄는 지은 적이 없노라고 방어에 나서게 됩니다 그 방어가 결국 욥으로 하여금 “나는 하나님 앞에서도 떳떳하게 의롭다”고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태의 번짐을 보고 엘리후라는 친구까지 나서서 말리게 됩니다 사람들과의 차원과 하나님의 차원을 연속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나서시면도 인간들 중 어느 누구도 예상못한 일을 하나님께서 욥에게 맡깁니다 그것은 바로 ‘중보자 기능’입니다 중보자적 기능은 제일 마지막에 나옵니다 욥에게 난데없이 주어진 고난의 완성이 중보자 기능과 연결되기 위함이었던 겁니다 중보자적 기능을 언급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인간과 인간들 끼리의 논쟁을 유도하신 겁니다 중보자적 기능의 모습은 마태복음 21:42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여기에 ‘버린돌’이 나옵니다 즉 중보자의 핵심 부위는 사람들에 의해 쓸모없음으로 판정된 대상자가 차지하게 된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왜 자기 주변에 쓸모없는 자를 양산하게 될까요? 이점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27:64를 통해서 일반화된 의식들을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마 27:64-66) 왜 당국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려고 했을까요? 과연 인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지킬 수 있다고 여겼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가 앞에 경비경이 있을 것을 보고 도로 무덤 속으로 되돌아 갔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세계관입니다 그들의 세계관 속에서 부활이 필히 들어와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즉 부활이 필요치 않는 세계관 속에서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세계로 여기는 겁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지키는 겁니다 이는 평소에 인간들이 문제가 있다면 그 해결책을 하나님에게 부탁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중보자직은 문제와 해결책을 뒤바꾸십니다 즉 인간은 자기에게 열쇠를 쥐고 싶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 자체를 자물쇠로 여기고 열쇠는 주님쪽에서 쥐게 됩니다 이는 인간들의 문제점은 주님의 열쇠에 맞추어서 문제가 일어나야 한다는 점을 말합니다 욥은 열쇠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을 자물쇠로 사용하시고 그리고 끝에 와서는 친구들이 욥에게 일곱 수송아지와 일곱 수양을 바치게 합니다 이는 중보자직 자체가 열쇠가 되어 여기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그 열쇠를 열쇠답게 딱맞는 자물쇠로서 만들어집니다 이는 곧 인간들은 하나님쪽에서 하나님의 상을 바꾸어버리는 움직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중보자 기능이 필요치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관계 맺고 싶어합니다 이런 인간들에게 대해서 바뀌어진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단언하시면서 일하십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7) 즉 성도는 인간을 중보자로 보여주기 위해 모형으로 쓰여지는 존재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욥과 친구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옳다고 논쟁을 한 겁니다 욥이 옳다는 것은 욥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설정한 중보자 노선에 참여된 자라는 조건 때문에 의로운 자로 등장하고 그렇지 못한 욥의 친구들은 자신의 죄를 중보자 앞에서 제사를 통해서 온전히 드러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판정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런 중보자적 안목에서 욥기 8:7를 해석해야 합니다 “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 주장은 하나님으로부터 ‘옳지 못하다’는 평를 받은 말입니다 그렇다면 소위 복음에 의해서 세상을 본다고 주장하는 우리 성도는 어떻게 이 주장을 어떤 식으로 공격할 수 있습니까? 중보자직에 의해서 철저하게 죄인됨을 부각합니다 침대에 눕는 자가 침대 스프링이 걱정하며 위로해주므로서 눕는 자의 자기 의로움을 유지할 하등의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껏 누워서 스프링의 용도를 빛나게 해야 합니다 우리 존재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따라서 ‘죄인 중의 괴수’라고 자백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은, 십자가의 가치를 드높이게 합니다 기존의 세계관에서 시작과 창대는 하나의 노선에 두 지점으로 여겨지지만 중보자는 전혀 상관없는 노선으로 등장해서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드러나게 했습니다 욥이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는 ‘나를 의롭다’고 주장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의를 침범하는 죄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죄와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중보적 기능을 통해서 새로운 기준이 나타난 겁니다 친구들에게는 없지만 유독 욥에게만 있는 것이 욥의 완벽한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욥에게 물어보지 않고 생겨버린 이유없는 고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모형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