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회 성지순례 [ 감곡매괴 성모성당, 연풍 성지 ]

한국천주교회 성지순례 [ 감곡매괴 성모성당, 연풍 성지 ]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에 위치한[ 감곡 메괴성당 ] 초대 본당 주임신부는 프랑스 출신의 임 가밀로 신부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1893년 사제서품을 받은 그 다음해인 1894년 첫 본당으로 교우촌, 신학당이 있었던 여주 부엉골에 부임하게 된다 하지만 성당이 사목지의 북쪽 끝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산지 부락이어서 본당 이전을 생각하던 중, 사목 방문차 여주를 지나 장호원에 이르러 산 밑에 대궐 같은 집을 보게된다 임 가밀로 신부는 이곳이 성당을 세우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 성모님, 만일 저 대궐 같은 집과 산을 저의 소유로 주신다면 저는 당신의 비천한 종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주보가 매괴 성모님이 되실 것입니다 " 부엉골로 돌아가서 성모 마리아께 끊임없이 청하였다 그 대궐 같은 집은 명성황후 민씨의 육촌 오빠인 민응식의 집이었다는 것 1882년 임오군란 때 민자영이 도망왔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1895년 민자영이 죽고 민응식이 서울로 압송되면서 의병들이 사용하게 되자 일본군들이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1896년 5월 성모성월에 그 모든 집터와 산을 매입, 묵 주기도 성월인 10월 7일 본당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매괴(玫瑰)는 중국어로 '메이구이'라고 읽으며 장미꽃이라는 뜻이다 로사리오의 중국식 표현이다 가밀로 신부의프랑스식 본명은 카미유 부이용 초대 본당 주임신부였으며 51년 동안 한국 땅에서 생활하며 어머니가 선종했을 때도 고향으로 가지 않고 열정적으로 사목했던 임 가밀로 신부는, 루르드에서 조금 떨어진 타브르 교구 출신의 신부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루르드를 자주 방문하며 독실한 성모신심으로 신앙을 키웠다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 사제서품을 받자마자 다음 해에 바로 조선에 선교사제로 파견되었다 발령이 나기 전 오지로 가는 자신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가르멜 봉쇄수녀원으로 가서 기도했는데, 그 때 리지외의 테레사( 소화 테레사) 수녀와 만나 영적 남매 결연을 맺었다고 한다 이는 꾸준히 이어져, 그녀가 24세의 젊은 나이로 선종하고 성녀로 시성된 후, 소화 테레사의 성상을 감곡 성당 내에 모시게 되었는데 그 성상은 지금도 감곡성당 내에 있다 [연풍성지] 연풍은 성 황석두 루카의 고향이며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교우촌이다 박해를 피해 연풍으로 몰린 교우들은 새재라는 천혜의 도주로를 이용해 관문 성벽 밑의 수구문을 통해 문경 땅을 넘나들며 모진 박해를 피했습니다 연풍과 새재가 기억하는 첫 인물은 12년간 새재를 넘나들며 이 지역에 신앙을 전한 최양업 신부입니다 새재 아랫마을인 문경시 진안리의 어느 주막에서 선종한 최양업 신부는 새재의 연봉인 배론 신학당 뒷산에 안장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황석두 성인은 부유한 양반집 자손으로 젊은 나이에 과거 길에 나섰다가 ‘천국의 과거 시험에 급제’하고 돌아와 가족들의 모진 반대를 극복하고 가족들을 모두 입교시켰습니다 학식과 신앙이 깊었던 연유로 다블뤼 주교를 도와 성경 번역과 사전 편찬에 종사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 위앵과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회장 등과 함께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했습니다 연풍 성지가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63년 공소로 쓸 옛 향청 건물을 매입하면서부터입니다 3백년이나 된 이 건물을 매입할 때만 해도 순교 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매입 후 논과 집 터를 정리하던 중 형구돌이 발견되었습니다 또 1968년 시복식 후 황석두 성인의 고향이 연풍임이 드러나자 성지 개발이 가시화되어 1979년 순교 현양비를 세우고 문중 산에 묻힌 성인의 유해를 1982년 연풍 성지로 천묘했습니다 이어서 다섯 성인상과 반석, 대형 십자가와 경당, 향청 건물 복원 및 야외제대와 성모상 등을 마련해서 순례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2014년 9월에는 성 황석두 루카 탄생 200주년 기념성당 봉헌식을 가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