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그분의교회 주일설교. "우리는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 (말라기 1:11-14)

2024년 6월 2일 그분의교회 주일설교. "우리는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 (말라기 1:11-14)

어둡고 긴 터널과 같은 70년이라는 포로 기간이 지나자 광명의 빛이 그들을 비췄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포로에서 건져내신 것처럼 그들을 마침내 바벨론의 억압과 포로에서 건져내셨습니다 바벨론이 무너지고 페르시아라는 대제국이 들어섰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왕명을 내려 유대인들을 본토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본토로 돌아가 꿈에 그리던 성전을 다시 짓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잃었던 땅을 되찾았고 집도 지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반드시 회복시켜주시겠다는 약속을 하나님께서 지키신 결과입니다 많은 반대와 방해가 있었지만 마침내 성전이 완성되었습니다 70년 전의 성전의 영광을 보았던 노인들은 새로 지어진 성전의 초라함에 통곡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성전을 지어 하나님을 예배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격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큰 행복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학자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70년간 중단되어 정체되고 침체된 이스라엘의 영적 부흥을 주도했습니다 그들은 무너진 여호와의 말씀을 세웠습니다 흐트러진 율법을 바로 세웠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세웠으며 예배와 규례를 정비하며 이스라엘의 부흥 운동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스라엘은 그렇게 조금씩 옛 영광을 되찾아 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또 100여년이 흘러갔습니다 때는 주전 약 450년경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대했던 회복이 이루어졌고, 그렇게 소망하던 성전이 지어졌건만,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역사를 잊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를 왜 심판하셨는지, 그들의 조상들이 왜 그토록 참담한 고통을 당해야 했는지, 자신들의 성전이 왜 그렇게 처참하게 무너져야만 했는지 불과 100년 사이에 모든 것이 잊혀져 갔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은 잠시였고 그들은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주전 570년,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공할 때의 그 부패의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170년 전의 부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바로 이 때에 드디어 이스라엘의 마지막 히브리인 선지자가 출현합니다 바로 말라기입니다 이미 에스라도 죽었고, 느헤미야도 죽었으며 아무도 이스라엘을 지도할 지도자가 없습니다 이 어두운 시대에 한 히브리인 선지자가 등장한 것입니다 말라기는 레위인으로 추정됩니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 성전을 짓고 잠시 영적으로 회복한 듯 했으나 불과 100년 사이에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을 그 시점에 말라기가 등장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과 두 번째 성전이 다시 재건되었건만 그들의 처음 뜨거웠던 믿음,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의 그 환희와 기쁨,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무한한 감사는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느헤미야가 이끈 부흥 운동이 지난 후 백성과 제사장들은 급속하게 안일에 빠졌습니다 율법을 지킨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이미 타성이 되어버렸습니다 날마다의 큐티가 기계적인 습관이 되어버린 것처럼, 날마다의 기도가 습관이 되어 중얼거리는 것처럼, 율법은 그렇게 그들의 종교적 타성이 되었습니다 예배는 이완되었습니다 때마다 제사를 드리는 일은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 되었습니다 값지고 귀한 재물을 드리는 것은 몹시 부담스런 일이 되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 그분 자체가 그들에게는 부담스런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꼭 이렇게 예배해야 하나?, 우리가 꼭 이렇게 제사를 챙겨야 하나?, 우리가 꼭 이렇게 우리의 재물을 드려야 하나?” 그들의 부담은 갈수록 늘어만 갔습니다 명절에 시댁을 찾아가는 며느리의 심정과 같았습니다 뒷방 노인에게 아까운 떡 하나 던져주듯, 그들의 예배와 예물은 그렇게 변질되어 갔습니다 모든 것이 습관이 되었고, 모든 것이 타성이 되었고, 모든 것이 형식이 되었습니다 주전 450년 전 그 시대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에 말라기가 드디어 세상에 등장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세상을 향해 마지막 비통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자신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언제 우리가 여호와를 모독하였는가? 언제 우리가 예배드리지 않겠다고 했는가? 언제 우리가 제물을 드리지 않겠다고 했는가? 그들은 이리 주장합니다 이런 그들의 생각이 표현된 구절이 6절입니다 그들의 말이 적반하장격 입니다 그들이 이리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도리어 하나님께 대들고 따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겠다고 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제사를 거부했습니까? 드릴 것 다 드리고 있는데 왜 이러십니까?”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분노하셨습니다 그들의 예배와 제사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그들의 이런 태도가 더욱 하나님을 분노케 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12절부터 14절입니다 12절부터 14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경멸하지 않았습니다 말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제사를 모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이 하나님을 경멸했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제사를 모독했습니다 비록 말로 하는 모독이 아니라 할지라도, 행동은 마음을 담고 있기에 받는 사람은 압니다 받는 사람은 무엇이 존중이고 무엇이 모독인지 압니다 좋은 선물은 좋은 마음에 잘 담겨야 합니다 받는 사람은 그런 선물의 의미를 압니다 무성의하고 예의에 어긋난 선물, 마음이 담기지 않은 선물은 오히려 받는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그들의 태도가 이러했습니다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 이 말은 그들이 식물을 드릴 때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는 말을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그들의 태도가 하나님을 경멸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멸하습니까? 그들은 자신들도 먹지 못할 식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우리 식으로 따지면 상하고 먹기 어려운 식물을 드렸다는 말입니다 도무지 예물로는 드려질 수 없는 것들을 드린 것입니다 자신들은 먹기 어려우니 그냥 버리자니 아깝고, 그래서 제물로 드려 생색이나 내보자 하는 식으로 드린 것입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을 경멸하는 태도입니까? 이들의 이런 태도는 비단 식물을 드릴 때에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동물을 드릴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13절을 보면 그들이 제물을 드릴 때에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라는 말은 “이 얼마나 힘들고 부담스러운 일인가?”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드리는 일을 귀찮아 했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렇게 해서 드리는 제물을 아까워했다는 말입니다 “드리기는 드려야 하는데, 주변 사람들의 눈도 있고, 관례도 그러하니 아니 드릴 수는 없고, 그렇다면 드려도 크게 손해가 안 되는 것으로 드려야 겠다 ” 이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을 번폐스럽게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코 웃음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조롱하고 모독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드린다는 것이 결국은 곧 죽게 되어 제물로 드려도 아깝지 않은 병든 것이나, 팔아도 돈이 안 되는 저는 짐승, 그리고 어딘가 흠이 있어서 팔 때에 손해가 되는 짐승, 그리고 남에게서 빼앗은 것이기에 그리 아깝지 않은 토색한 것들, 이런 것들을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잘못을 주도한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제사장 그룹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제사를 거룩히 하고 예배를 잘 주도해 나가야 했는데 오히려 그들이 이스라엘의 부패를 부채질했습니다 그들이 앞장서서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참된 것을 가르치고 모범을 보여야 할 무리가 도리어 부패와 타락의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물 드리는 일을 귀찮아하고, 하찮게 여긴 제사장들은 제물 드리는 자들이 토색한 것과 저는 것과 병든 것을 가져와도 하나님께 그냥 드렸습니다 여기서 토색한 것이라는 말은, 앞에서 설명드렸듯이 남에게서 빼앗은 것이라는 말도 되지만, 이 말은 짐승에게 찢겨서 상처가 난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드리는 일을 금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것을 하나님께 가져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것을 하나님께 가져오면 제사장들은 이것들을 구별하여 제물로 드리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런 일들을 귀찮게 여겨 아무것이나 마구잡이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어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물을 받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이렇게 행하니 일반 백성들도 제사장들의 이런 악행을 본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서원할 때 수컷을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본래 가축은 암컷이 더 귀한 법입니다 왜냐하면 암컷은 새끼도 낳고 또한 젖도 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를 생각하셔서 서원할 때, 암컷이 아닌 수컷을 정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와 같이 은혜를 베푸셨건만, 그들은 서원할 때, 그들이 정한 수컷마저도 제대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서원할 때 수컷을 정해 놓고 막상 드릴 때에는 수컷 중에서 흠 있는 것을 골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속여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래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