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오릉  #장희빈대빈묘  #경릉  #창릉  #명릉  #익릉  #홍릉  #조선왕조 19대 숙종의 후궁 경종의 생모 장희빈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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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 대빈묘 서오릉西五陵은 한양을 중심으로 서쪽에 다섯 기의 능陵이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세조 떄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병약으로 20세 나이에 세상을 뜬다 조선 9대 성종이 덕종으로 추존된다 덕종과 소혜왕후의 경릉과 8대 예종과 인순왕후의 창릉昌陵, 19대 숙종과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와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의 명릉明陵,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익릉翼陵, 21대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홍릉弘陵을 일컫는다 그 밖에 2기의 원園과 1기의 묘(墓가 있다 1기의 묘가 바로 20대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의 대빈묘가 있다 장희빈은 조선 19대 숙종 때의 한 명의 궁녀이다 궁녀는 임금을 비롯하여 왕족과 사관대작들의 손발이 되어 한 마디로 성노리개이며 노예들이나 다름없었다 상왕이나 대비마마 원처인 왕비가 있어도 그것은 불법이 아닌 그 시대의 관습법과 같은 것이었다 숙종은 기록상으로만 세 명의 왕비와 여섯 명의 후궁을 두었다 숙종의 첫번쨰 왕비 인경왕후는 천연두에 걸려서 사망을 한다 슬하에 두 딸도 어린 나이에 엄마 뒤를 이어 하늘나라로 떠난다 숙종은 그 즈음에 숫처녀 궁녀인 장옥정과 사랑의 늪에 빠진다 두번째 왕비인 인현왕후가 있지만 세자가 될 아들도 없으니 안중에도 없엇다 매일 밤마다 장옥정 궁녀방을 드나들 뿐이다 오랫동안 아들이 없다가 궁녀 장씨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는다 전갈을 받은 숙종은 한달음에 장희빈과 아들을 끌어 안는다 어의도 신발도 벗을 새가 없다 이 때 숙종의 나이는 27세이며 희빈이도 같은 또래가 아닌가 " 옥정아 ! 영원한 내 사랑 당신뿐이야, 당신은 유일한 내 아내로 왕비가 되는 거야 "라는 있는 말 없는 말을 쏟아내며 욕정을 만끽한다 " 짐은 오늘 이 자리에서 장희빈을 왕비로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노라 "라는 숙종의 어명이 떨어진다 "전하! 인현왕후가 아직 쌩쌩한 20대로 앞으로 얼마든지 세자를 낳을 수 있사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 양 옆으로 도열한 문무관 신하들이 구걸하듯이 읍소를 하고 있다 하지만 숙종은 안하무인 독단으로 남인의 힘을 빌려 세자를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봉한다 이어 민비를 폐한 뒤 장희빈을 왕비로 올리고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을 등용시킨다 이를 기사환국己巳還局이라 한다 숙종이 14세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그래도 45년간 재위하며 커다란 공든 탑도 많이 세운 공적도 있다 뒷면에는 인간 이하의 독단의 무소불위의 칼자루를 휘두른다 숙종의 14년 동안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3차레 환국정치로 50여명의 신하들이 처형된다 숙종의 인현왕후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다가 결국은 숙종의 사약을 받고 장희빈은 1701년도에 세상을 뜬다 30대의 창창한 젊은 나이에 헌 신짝처럼 버림받은 것이다 서오릉의 경릉 창릉 명릉 익릉 홍릉 다섯개 능은 비공개로 일반인들의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능 아래에서 쳐다볼 뿐이다 그러나 장희빈의 대빈묘는 능陵이 아니라서 가까이서 바라볼 수가 있다 규모 자체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2019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