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0926 태장성결교회 주일 3부 오전예배, “제자도, 우리 아닌 것을 우리로 받아들이기”, 마가복음 9:38-50
22:01 호산나찬양대 바로가기 26:07 설교말씀 바로가기 설교제목: “제자도, 우리 아닌 것을 우리로 받아들이기” 설교본문: 마가복음 9:38-50 마가복음 9장 38 요한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⑥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 ⑥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이' 39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쉬이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41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42 "또 ⑦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⑧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 ⑦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나를'이 없음 ⑧그, '넘어지게' 43 네 손이 너를 ⑨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곧 그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손을 잃은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 ⑨그, '넘어지게' 44 (없음) / 권위있는 고대의 사본들에는 44절과 46절이 없음. 후대 사본에는 44절과 46절에 48절과 같은 본문이 첨가되어 있음 45 네 발이 너를 ⑪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발을 가지고 ⑫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발은 잃었으나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 ⑪그, '넘어지게' ⑫그, '게헨나' 46 (없음) / 권위있는 고대의 사본들에는 44절과 46절이 없음. 후대 사본에는 44절과 46절에 48절과 같은 본문이 첨가되어 있음 47 또 네 눈이 너를 ⑭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①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 ⑭그, '넘어지게' ①그, '게헨나' 48 ②지옥에서는 ③'④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들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 ②그, '게헨나' ③사 66:24 ④그, '그들의 벌레들' 49 모든 사람이 다 소금에 절이듯 불에 절여질 것이다.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너희는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겠느냐? 너희는 너희 가운데 소금을 쳐 두어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 설교요약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예고 이후 제자들이 길 위에서 “누가 크냐”로 다툰 이야기(9:30-34)를 나누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집단이 벌이는 내적 암투가 제자공동체(교회)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봅니다. 이에 예수님은 “첫째가 되는 길”을 가르치셨습니다(9:35-37). 오늘 말씀도 충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9:33-34 말씀이 신앙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멤버들 사이의 경쟁과 각축이라면, 9:39은 신앙공동체 바깥사람들(우리를 따르지않는 사람)과 벌이는 경쟁과 각축입니다. 이는 우리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으면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사람들의 사역을 허용해야 하는가의 여부를 따지는 상황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공동체 내적으로는 제각각 “내가 크다”고 다투던 사람들이 공동체 바깥에 있는 이들을 향해서는 “우리를 따라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냅니다. 상대를 내(우리) 발밑에 두겠다는 의도입니다. “우리”와 “우리 아닌 이들” 사이를 가르는 습성은 교묘하고 완강합니다. 기득권을 가지려하거나 지키려는 이들이 “우리”을 힘주어 말합니다. 우리를 강조함으로써 “우리의 특권”을 정당화시키고 우리의 결속력을 강화시켜 더 큰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목적을 가장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보통 “배타(排他)”라는 무기를 사용합니다. 배타는 “너(희)는 우리가 아니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자신들의 우월함을 증명하려는 방법입니다. 유대교의 그림자인 선민사상은 전적으로 배타의 논리 위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예수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들의 다양한 특성과 전통을 무시하고 정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누가 큰가?”의 논쟁에 답하신 예수님은 이어지는 논쟁에 대해서도 가르침(제자도)를 제시합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40)는 말씀은 배타성을 무력화시키는 원칙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최소한의 조건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따라야 하거나 우리 편이 되어야 한다는 명분은 제거합니다. ‘우리에게 속하였는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41)라는 더 포괄적인 기준을 제시합니다. 덧붙여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이들을 환대해야 한다는 말씀도 하십니다(41) 이어서 작은 자들(우리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을 죄짓게(실족)하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 언급됩니다(42). 그들이 받는 심판은 큰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또 지옥불에 던져지는 것에 비견됩니다. 죄짓게(43,45,47)하는 것은 우리가 아닌 이들에 대한 배척을 지칭합니다. 이 비슷한 말씀이 마태복음에도 나오는데 거기서는 ‘유혹에 빠져 잘못을 범하게 하는 지체’를 문제 삼는다면, 마가복음은 ‘작은 사람을 죄짓게하는 지체’를 문제 삼습니다. 마침내 성취해야할 것은 ‘평화(화목)’입니다(50). 평화는 우리와 너희를 구별하는 장벽을 넘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에 함께함으로 이루어집니다. 49절의 소금과 50절의 소금의 의미가 대조적입니다. 49절에서 심판의 비유로 소금을 말한다면 50절은 소금처럼 녹아져 맛을 내는 화목의 도구로 비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