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속의 사랑] 두 번의 결혼과 마음 아픈 사별로 재산이 많아진 퇴계 이황
#한국사속의_사랑 #사별 #퇴계_이황 #퇴계태실 #춘천_박씨 #도산서원 #이우 #상경여빈 #이준 #이채 #허씨_부인 #권씨_부인 #가례동천 #지산와사 #성학십도 오늘 한국사속의 사랑은 두 번의 결혼과 마음 아픈 사별로 재산이 많아진 퇴계 이황입니다. 퇴계 이황은 살아서도 존경받는 대학자였지만 죽어서도 조선 유학의 거유(巨儒)로 추앙받았는데 평생 벼슬을 70여회나 사양하면서 학문연구, 인격도야, 후진양성에 힘써 교육과 사상의 큰줄기를 이루었습니다. 그가 정립한 조선의 성리학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조선에 끼친 폐해가 컸지만 존경을 받는 이유는 겸양과 섬김, 지극한 가족 사랑, 검약과 절제롤 몸소 실천하는 삶을 죽는날까지 일관되게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퇴계의 이런 인품과 학문적 성취는 그와 함께 인생을 개척한 어머니와 두 아내 등 주변의 여인들과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형성된 것입니다. 퇴계 이황은 경북 안동 예안의 노송정에서 태어났는데 오늘날 노송정 고택에는 퇴계가 태어난 방을 ‘퇴계태실’로 꾸며놓아 일반 방문객을 맞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식이었고 어머니는 춘천 박씨였으며 아버지의 첫 부인은 의성 김씨였는데 2남 1녀를 낳은 후 29세 나이로 세상을 떴고 부친은 춘천 박씨를 후처로 받아들여 이의·이해·이징·이황의 4형제를 낳았습니다. 부친이 1502년 6월 마흔 나이에 세상과 하직했을 때 춘천 박씨는 33세였고 퇴계는 유복자나 다름없는 7개월을 막 넘긴 갓난아기였습니다. 퇴계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전처 소생까지 포함해 7남매를 홀로 키우는 어머니의 고단한 삶을 곁에서 보고 자랐는데 어머니에게는 가정교육을, 숙부인 이우에게는 글을 배워 학문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그 결과 1533년 대과에 급제해 고향을 떠나 서울에 터를 잡을 수 있었는데 벼슬은 점점 높아졌지만 중년이 된 후에는 혼란한 중앙정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낙향을 꿈꿨습니다. 그 과정에서 건립한 도산서원은 퇴계 삶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남아있으며 1570년 70세로 눈을 감았습니다. 퇴계가 1501년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는 13년 전 작고한 상태였고 아버지는 그로부터 7개월 후 별세했기 때문에 집안의 큰 어른은 할머니였고 어른은 어머니였습니다. 퇴계는 93세까지 장수를 누리다가 1522년 숨진 할머니 영양 김씨와, 1537년 67세로 작고한 어머니 춘천 박씨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성장해서는 2번의 결혼과 사별을 겪고 2명의 며느리를 맞았으며 때로는 첩도 있었고 관기와도 사랑을 나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