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바틀비의 정치학/허먼멜빌/라깡/환상 가로지르기/지젝/바틀비 정치학/'부정적인 것에 머무르기/주체화/대타자/분열된 주체/죽음충동/쾌락원칙/공백/수동적 공격/의미체계

필경사바틀비의 정치학/허먼멜빌/라깡/환상 가로지르기/지젝/바틀비 정치학/'부정적인 것에 머무르기/주체화/대타자/분열된 주체/죽음충동/쾌락원칙/공백/수동적 공격/의미체계

오늘은 미국의 19세기 작가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라깡과 지젝의 관점에서 이해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필경사 바틀비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문학비평계에서 초미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소설입니다 특히 상식적인 선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주인공 바틀비의 언행동에 대해서는 그동안 수많은 비평가들이 비평을 쏟아냈을 뿐만 아니라 심지아 들뢰즈, 데리다, 조르지오 아감벤, 지젝과 같은 철학자들도 주체화와 부정성이란 관점에서 언급했죠 그만큼 필경사바틀비는 지금까지도 문학과 철학뿐만아니라 정신분석학계에서 문제작으로 이슈가 되어온 작품입니다 오늘은 줄거리는 생략하고 곧바로 라깡의 속지않는 주체와 환상 가로지르기라는 관점에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꼭지에서는 필경사 바틀비를 하나의 독특한 정치학으로 해석한 지젝의 바틀비 정치학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감산의 정치, 부정성의 부인, 수동적 공격성을 살펴보고요 그런데 지젝의 부정성 개념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언급한 부정성으로부터 탄생한 만큼, 헤겔의 부정성에 대해도 간단히 언급하겠습니다 라깡에게 우리가 살고있는 이 현실세계는 일종의 가상, 혹은 환상 입니다 그렇다면 소설이 허구를 통해서 진리를 발견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처럼 정신분석 역시 현실이라는 이 환상의 세계가 상상, 상징, 실재에 의해 재생산되고 재현된 것임을 알려줌으로써 우리의 정신세계를 재구성할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면에서 문학과 정신분석은 맞닿아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라깡은 현실을 왜 환상이라고 하는가,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우리가 어려을 적 겪었던 주이상스가 상상적으로 재생산되고, 상징계에서는 사물이 언어로 재현되어 현실에 나타나고, 부분충동과 대상a와 같은 실재의 파편들이 현실로 빈번하게 출몰하는 것에 의해서 우리의 현실은 세계와 나의 무의식에 있는 진짜 상이 은폐되고 왜곡된 결과로 생성된 것입니다 상상계는 주로 몸과 이미지가 기능하는 곳이기 때문에 현실을 살아나가는데에 이미지로 주체를 강력학 사로잡는 것입니다 상징계에서 우리는 언어와 사물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고 응시와 시선이 어긋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또한 실재는 즉 부분충동이 현실세계에 빈번하게 출몰하여 우리의 발걸음을 헛딛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이 현실세계는 상상계와 상징계와 실재가 서로 상호작용한 결과입니다 현실세계에서의 대상들은 우리가 처음 경험한 그대로 다시 찾아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니까 현실은 대상을 결코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환상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인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신경증자들은 이러한 실재를 환상 즉 자본, 섹스, 권력의 행사와 같은 스크린으로 은폐한 채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부류인 것입니다 즉 신경증자들은 현실, 즉 어뗗게해서든 대타자의 결여를 은폐하고 환상속에서 안온하게 대타자의 보호속에서 살려는 사람을 말하죠 그에 반해서 인생의 어떤 전환점에서 이러한 환상, 욕망의 환타지에서 벗어나려는 주체도 있습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의미화 체계로부터 이항대립항이 없는 세계, 욕망의 생성이 없는 세계인 공백으로 파고들려는 주체가 있다는 것이죠 이는 분열된 주체로부터 대타자에 저항하는 온전한 주체 다시말하면 주체화를 이룰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환상의 가림막을 찢어내서 틈을 만든다는 의미에서 환상 가로지르기라고 말합니다 이 작품에 나오는 변호사는 이 현실세계, 당시 금융자본주의라는 대타자에 지나치게 순응하는 주체이고 반면에 바틀비는 금융자본주의와 관료주의적 삶에 저항하는 속지 않는 주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현실이라는 환상, 현실이라는 가상에 속지 않는자(les non-dupes)라는 의미죠 불어의 dupe는 쉽게 속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환상에 속지않는 자가 되었기에 이 사회적 장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라깡은 les non-dupes-errent속지않는 자는 방황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LES NOMS DU PÈRE와 발음이 유사하죠 이는 아버지의 이름들 라깡은 이렇게 서로 대립되는 프랑스의 단어를 동음이의어를 이용해서 신조어를 만드는 것을 즐겼습니다 우리 문명사회의 인간은 그 자체로 온전한 주체가 아니고 언어체계, 다시말하면 사회적 담론에 의해 형성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죠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다양한 대타자들에 의해 예속되고, 종속되어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욕망과 이성에 의해 사는 게 아니라,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의존하고, 사회의 오래된 습속에 의존하고, 미디어가 쏟아내는 정보에 의존하는 삶, 가상이미지에 사로잡혀사는 삶, 한 마디로 대타자에 전적으로 순응하는 방식, 즉 지금당장 등 따뜻하고 안온하고 이웃과 동등하거나 그보다 물질적으로 더 잘산다고 생각되기만 하면, 그리고 자기가 타인보다 더 도드라져 보이기만 하면, 자신의 고유한 존재나 주체성, 진리와 같은 근본문제들에는 도무지 관심을 갖지 않는 삶을 산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변호사와 바틀비 모두 증상에 진입한 신경증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바틀비는 상징계, 현재 사회적 장에서 펼쳐지는 의미체계에 정면으로 저항하면서 I would prefer not to, 즉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발화문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기표이죠 지젝은 이 발화행위자체는 사회적 장에서 통용되는 의미체계로부터 물러섬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나의 일상적 삶을 지탱해왔던 사회적 장에서 물러나는 것을 지젝은 감산의 정치이고 곧 바틀비의 정치학이라고 지칭한 것입니다 감산의 정치 마이너스의 정치라고 지칭한 이유는 기표들의 연쇄속에서 욕망이 분출되고 이 상징계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은 이 욕망들을 끈덕지게 쫓아다니면서 신체적, 경제적, 사회적 쾌락을 획득합니다 그러나 바틀비처럼 이 욕망을 산출하는 의미체계로부터 등을 돌려 실재의 공백으로 물러선다면 우리는 손해보는 삶을 산다고 생각할 겁니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의미체계에는 긍정과 부정이라는 이항대립 구조로 되어있는데 I would prefer not to, 즉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발화문은 긍정판단도 부정판단도 아닌 긍정과 부정의 사이, 공백을 파고드는 언표인 것이죠 이를 긍정판단도 부정판단도 아닌 무한판단인 셈입니다 칸트는 이를 초월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한 바 있죠 그래서 지젝은 이를 부정성의 부인, 혹은 disavowed negativity부인된 부정성이라고 지칭하고 푸코의 단순한 권력에의 저항과 법에 대한 위반과 차별화합니다 왜냐하면 권력과 법에 대한 저항 즉 위반으로는 사회체계를 바꾸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현재의 사회체계와 권력을 더 강화시켜주기 때문이죠 그래서 지젝은 헤겔의 부정성에 주목해서 여기에 라깡의 실재 혹은 라깡의 공백의 의미를 결합해서 새로운 부정성의 부정이란 개념을 도출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