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애가/지화자

산동애가/지화자

설명 1.노래 : 산동애가 2.가수 : 지화자 3.영상 : 사랑방 4.가사 산동애가(山同哀歌)-지화자 (정성수 작사 김부해 작곡)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놓고 까마귀 우는 곳을 멍든 다리 절며 절며 다린 머리 쓸어안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산 골짝에서 이름 없이 쓰러졌네 (대사) 살기 좋은 산동마을 인심도 좋은데 산수유 열매 따서 부모 효성 다 못하고 열아홉 살 꽃봉오리 피기도 전에 까마귀 우는 곳을 나는야 간다 꽃이 지면 다시 피고 세월 가면 봄은 오건만 이내 몸 인제 가면 언제나 돌아올 거나 노고산 화엄사 종소리야 너만은 아! 너만은 영원히 울어다오 잘 있거라 산동아 한을 안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어보지 못한 채로 회오리 찬바람에 엄마 아빠 묶여가는 발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화엄사 종소리에 영원토록 울어다오 노래 탄생 사연 백부전은 실제 인물이었다. 산동면 상관 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열아홉살 여순사건 때 국군에 의해 총살당한 것으로 추적되었다. 부전은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었고, 호적상의 이름은 백순례(白順禮)였다. 왜 그 노래를 남긴 것일까. 1948년 여순사건 당시 구례군 산동면을 비롯 황전·토지면 일대는 좌익군인들의 무대였다. 여수에서 반기를 든 좌익군인들이 이곳까지 이르렀기 때문. 특히 산동면은 군경과 좌익이 대치하며 피를 흘렸던 비극의 현장이었다. 해방공간에서 온 나라가 좌, 우로 갈렸었다. 구례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여순사건중 산동에선 이른 바 '좌익 명단'이 큰 회오리를 일으켰다. 어떤 식으로든 좌익단체에 그 이름이 오른 사람들은 혐의를 벗어나기도, 결백을 주장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뿐 아니라 '밤손님들'(좌익군인)에게 협조했다는 구실로도 죽임을 당한 것은 부지기수였다. 백순례의 조카가 살고 있다. 그가 할머니로부터 들었다는 사연은 이렇다. "당시 미혼이었던 아버지와 고모(백순례)가 군인에게 함께 끌려갈 처지였다고 합니다. 끌려가면 바로 죽음이었으니 얼마나 절박했겠습니까. 고모가 나서서 '제가 갈 테니 오빠만이라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고 합니다. 집안의 대를 잇는 대신 자신을 희생한 것이죠. 고모가 아니었다면 제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백순례가 끌려가면서 스스로 지어서 불렀다는 것이 바로 이 산동애가. 수많은 산동의 처녀들이 산수유 열매를 따려 이 노래를 이어받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