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록] 뇌물, 청탁, 가족비리로 얼룩진 황희 정승이 20년이나 영의정을 지낸 비결은?

[선비록] 뇌물, 청탁, 가족비리로 얼룩진 황희 정승이 20년이나 영의정을 지낸 비결은?

#조선궁중비사 #황희정승 #영의정 #조정능력 #서달사건 #태종 #세종 #김종서 #맹사성 #허조 #황중생 #황보산 #황치신 #황수신 #양녕대군 #소공대 오늘 조선궁중비사는 뇌물, 청탁, 가족비리로 얼룩진 황희 정승이 20년이나 영의정을 지낸 비결입니다. ‘청백리’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조선 초기 명재상 황희는 사실 청렴함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는데 태종 시대 최고 실세 중 하나인 ‘지신사’를 거쳐 세종시대에 거의 20년간 영의정 자리에 있었습니다. 황희에게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조정능력’으로 왕의 개혁과 정책이 현실에 착근할 수 있도록 내용을 조정했고, 신하들 사이에서의 논쟁을 조율하며 합의를 이끌어냈습니다. 이처럼 황희는 비록 ‘청백리’는 아니었을지 모르나 2인자에게는 훨씬 더 중요한 덕목이자 능력, 바로 ‘탁월한 조정능력’으로 조선 최고 재상의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황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신선 같은 수염을 기른 인자한 노(老) 정승, 그리고 청백리 재상으로 황희에 대해서는 수많은 일화들이 전해져 옵니다. “붓으로 먹을 찍어 글씨를 쓰려고 하는데 종의 아이가 그 위에 오줌을 쌌으나 아무런 노여운 기색도 없이 손수 그것을 훔칠 따름이었다.” 해동아연 “남루한 옷차림에 맨발의 어린아이들이 들어와서 어느 놈은 공의 수염을 잡아당기고, 또 어떤 놈은 공의 옷을 밟으며 술상 위의 안주를 모두 움켜쥐고서 먹고, 또 공을 때리기도 하니, 공이 말하기를 ‘아프다. 아파’라고 할 뿐이었다. 이 어린아이들은 모두 노비의 아이들이었다.” 청파극담 어느 날 세종이 미복 차림으로 황희의 집을 방문했다가 청빈하고 검소한 모습에 감동해 새 집을 하사했다 임하필기 그런데 이러한 스토리들이 정말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조선시대 내내 황희가 재상의 사표(師表)로 여겨져 와서 사람들이 원하는 재상상이 황희라는 인물에 투영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종의 구전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된 것인데 황희가 온화하고 관대했다는 것은 당시의 기록 곳곳에 등장하지만 청백리라는 부분은 실제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