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처럼 화려한 조선 최대의 사찰 / 태조 이성계가 머물렀던 곳 / 양주 회암사

왕궁처럼 화려한 조선 최대의 사찰 / 태조 이성계가 머물렀던 곳 / 양주 회암사

#사찰여행 #저절로TV #30초리뷰 회암사는 한 때 수백여 칸과 3천여 명의 승려라는 대단한 위용과 면모를 자랑했던 조선 최대의 왕실 사찰이었습니다 현재 여전히 발굴 복원작업 중인 회암사지를 옆으로 끼고 절골을 따라 천보산(天寶山:423m) 쪽으로 비탈길을 600여 미터 올라가면 또 다른 이름의 회암사를 만나게 됩니다 조선이 숭유억불 정책을 표방하고 불교에 대한 탄압이 가속화 됨에 따라 사찰의 황폐화는 더욱 심화되었으나 명종 재위(1545-1567)시에는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 부흥정책을 펼치면서 회암사는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죽자 다시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였고 유생들에 의해 절이 불태워짐으로써 폐사화되었습니다 흙 속에 파묻혀 문헌상으로만 남아있던 회암사는 1964년에 그 존재가 확인되고 1997년도부터 본격 발굴 진행 중입니다 출토된 불상이 하나같이 목이 잘리고 한군데 묻혀있는 것으로 보아 방화에 의한 소실이라는 추측이 무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고 있습니다 조선은 성리학을 이념으로 세워졌지만 태조 이성계는 성리학자가 아닌 군인이었습니다 군인이 적을 만나면 내가 죽지 않으려고 상대를 죽이고 나서 생각는데 성리학자는 상대를 죽이기 전에 심사숙고하고 그 후에도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고 논리적으로 합리화합니다 때문에 속죄하는 마음이 생겨도 성리학자는 부처님을 찾지 않지만 군인은 부처님을 찾아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위안을 받습니다 이는 아마도 전두환 대통령이 백담사를 찾은 사례도 예외는 아닐 듯 싶습니다 부왕이 회암사에서 지낸다는 소식을 들은 태종은 그가 머물 행궁을 짓게 했고 간간이 행차해 문안을 올리곤 했습니다 회암사지는 격동의 시기에 불법의 중심이자 태조 이성계가 머문 왕궁이었고 남은 여생의 수련도량이기도 했습니다 고요함과 적막함이 깃든 이 절터에 해가 기울기 시작하며 당시의 모습을 가늠할 수 없는 회암사지의 주춧돌에 지금의 시간이 더해져 아득하게만 느껴질 뿐이며 모든 것이 왔다가 가야하는 존재임을 다시금 깨우쳐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