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미 - 안개 낀 장충단 공원 (1967)
노래 이야기 음악과 문학의 소재 중에서 '낙엽' 다음으로 매력 있는 소재는 아마도 '안개'일 겁니다 옛날 동양화에서도 농촌과 강촌의 풍경에는 으레 비 온 뒤에 피어오르는 자욱한 안개가 있었고요 특히, 안개가 사랑과 연결되면 더욱 낭만적인 느낌으로 그려지는데요 사랑과 안개가 결합되면, 애잔한 느낌이 동반되면서 가슴아픈 실연과 방황이 연상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가요에서도 1960년대엔 '안개'가 크게 유행했는데요 1962년에 현미 선배님이 '밤안개'로 화려하게 데뷔한 이후, 1967년엔 정훈희 선배님의 '안개'가 발표되고, 또 배호 선배님이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 그리고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을 노래하면서 가요계에 '안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특히, 1967년에는 가요계뿐만 아니라, 문학계에서도 김승옥 작가의 소설 '무진기행'이 발표되면서 젊은이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요 그 당시 6 3 부정총선과 한일호 침몰사건, 그리고 팍팍한 경제상황 등으로 사회분위기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었고요 불투명한 미래를 안고 객지를 떠돌던 청춘의 외로움과 고단함이 '안개'라는 소재에 더 이끌리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안개'가 등장하는 노래들의 공통점은 가수들의 목소리와 멜로디가 자욱한 안개처럼 가슴을 촉촉하게 적신다는 건데요 그중에서 배호 선배님이 중후하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노래한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은 지금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신비로운 마성의 노래로 손꼽힙니다 배호 선배님의 유년시절은 평탄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지요 독립운동을 위해서 중국 산둥성으로 이주했던 독립운동가 부모님 슬하에서 태어나서, 광복 이후 3살 때 우리나라로 돌아왔지만 13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요 그 후 부산에 있는 이모의 집에 내려가 살았지만, 집안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중학교를 중퇴하고, 서울에 있는 외삼촌에게 의탁해서 지내게 되는데요 악단장이자 작곡가였던 외삼촌 김광빈 선생님과 함께 지내면서 배호 선배님은 다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고, 드럼을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지요 참고로 '배호'라는 예명도 이때 김광빈 선생님이 지어준 이름인데요 1958년부터 1964년까지 외삼촌 김광수와 김광빈 선생님의 악단, 미군부대, 카바레, MBC 악단, 김인배 악단 등에서 드럼을 연주하던 배호 선배님은 '배호와 그 악단'을 결성해서 활동하다가 1964년, 김광빈 선생님이 작곡한 노래 '굿바이'와 '두메산골'을 부르면서 가수로 데뷔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습니다 그러다 먼 친척이었던 무명의 신진 작곡가 '배상태' 선생님을 만나면서부터 '배호' 선배님은 커다란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요 바로 배상태 선생님이 작곡한 '돌아가는 삼각지'와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이라는 불세출의 명곡을 부르게 된 거지요 지금도 많은 분들이 사랑하는 명곡이지만, '돌아가는 삼각지'와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은 배호 선배님이 만성 신부전증으로 투병하는 와중에 녹음한 노래였습니다 건강이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쓸쓸한 처지를 대변하는 듯 한 가사와 멜로디를 노래한 곡이 '돌아가는 삼각지'였고요 이 노래가 크게 히트하고 몇 개월 후, 다시 병중에 녹음한 곡이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이었지요 그리고 투병 중에 녹음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욱한 안개를 연상시키는 슬로우 템포에 맞춰 노래한 배호 선배님의 묵직하면서도 울림 있는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깊은 감동을 전해주었습니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번 어루만지며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 비탈길 산길을 따라 거닐던 산기슭에 수많은 사연에 가슴을 움켜쥐고 울고만 있을까 가버린 그 사람이 남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 있는데 외로움을 달래가면서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 허스키한 저음의 짙은 감성부터 고음의 여린 감성까지 담겨있는 배호 선배님의 노래는 안개와 같은 신비로움을 전해주면서 큰 사랑을 받았는데요 노래가 큰 사랑을 받으면서 다행스럽게도 다시 건강을 회복한 배호 선배님은 다시 왕성하게 활동을 펼쳤지만, 병마는 그리 쉽게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오랜 투병생활로 약해진 면역력으로 인해 여러 합병증이 생기면서 결국, 스케줄 도중 쓰러진 '배호' 선배님은 팬들의 눈물 속에 스물아홉이란 나이로 영면에 들고 말았는데요 배호 선배님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간은 고작 6년이었고요 그 6년 내내 병마와 싸우며 노래했던 배호 선배님이었기에 지금도 배호 선배님의 노래를 들을 때면 왠지 모를 울컥함에 가슴 깊은 곳이 아려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배호 선배님이 만일 지금까지 살아계시면서 중후한 목소리로 가요무대에서 얼마나 멋진 노래를 들려주셨을까 상상해보면, 더 안타까운 마음이 커지는데요 시간은 많은 것을 잊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흐를수록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존재들이 있지요 배호 선배님이 남긴 귀한 노래가 그렇고, 또 배호 선배님에 대한 그리움 역시 세월이 흐를수록 더 진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요즘처럼 안개 자욱한 날이 많을수록 더 생각나는 노래가 바로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인데요 비록 만날 수 없지만, 여전히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이 시간, 진한 그리움을 만나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