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역사스페셜 – 조선판 공부의 신, 왕세자 교육
- 조선시대 왕세자도 야간 보충수업을 받았다 조선 왕세자의 하루는 공부의 연속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받는 수업인 조강(朝講), 낮에 받는 수업인 주강(晝講), 저녁에 받는 수업인 석강(夕講)이 기본이었다 보충학습도 받았다 낮시간의 보충학습을 소대(召對), 밤의 보충학습을 야대(夜對)라고 했다 스승들은 세자시강원에서 교대로 숙직하면서 24시간 왕세자의 학습을 지도했다 동궁은 하나의 작은 기숙학교였다 왕세자는 잦은 평가에도 시달렸다 매일 수업이 시작할 때는 전날 배운 것을 완벽히 외워야만 진도를 나갈 수 있었다 매달 두 번씩 그동안 배운 내용을 스승들 앞에서 복습하는 시험인 회강에 참석해야만 했다 회강에는 임금도 참석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 경우 왕세자는 20여 명의 스승 앞에서 혼자 시험을 치러야만 한다 - 1명의 왕세자를 스무 명이 넘는 스승이 가르치다 1626년 소현세자의 스승은 세자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자, “눈을 이리저리 돌리는 것은 마음을 다잡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 라고 따끔히 지적했다 왕세자의 학습이 부진하면 스승은 가차 없이 왕세자를 질책했다 왕세자 교육에는 조선사회 최고의 지식인들이 동원되었다 인종의 원자때 스승은 조광조, 세자때 스승은 이황이었다 왕세자 책봉이 이루어지면 교육전담 기관인 시강원이 설치됐다 시강원에 소속된 스무명의 스승이 왕세자 교육을 전담했다 정1품부터 7품까지 총 20명의 스승이 왕세자 1인을 가르쳤다 정1품 영의정이 왕세자의 사(師)로 임명되었고, 좌의정이나 우의정 중 한 명이 부(傅)가 되었다 삼정승 중 두 명이 왕세자의 사부(師傅)가 되는 셈이다 - 암기와 조기교육을 기본으로 하다 영조는 손자 정조를 교육할 때, “내가 일찍이 소학을 100여 번 읽었기 때문에 지금도 기억하여 욀 수 있다 ”라고 말할 정도로 암기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왕세자교육은 암기를 기본으로 했다 경전의 문구를 보지 않고 통째로 외우는 것이다 유학에서 암기는 경전 이해를 위한 첫걸음이다 암기하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이 전통교육의 철학이었다 암기는 실천을 위한 첫걸음이었다 조선 후기 왕들의 학업진도를 기록한 열성조계강책자차제에 따르면 왕들은 평균 5세의 나이에 교육을 시작했다 조기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평균 5세 정도에 강학청이 설치되어 학습을 시켰다 초학의 교재는 효경소략, 소학초략, 소학, 동몽선습이 많았고, 8살 이후 대학을 시작으로 사서삼경을 읽기 시작했다 - 일상이 교육이고 교육이 일상이다 왕세자 교육의 시작은 아침에 일어나 어른께 문안하는 것이었다 어린 왕세자는 아침마다 왕의 수라상을 미리 살피는 시선, 병환 중에는 약을 먼저 맛보는 시탕을 했다 영조는 수십 년간 부친 숙종과 형인 경종의 시탕을 했다 시선과 시탕을 마친 다음에야 비로소 조강이 시작됐다 효를 중시하는 조선에서 시선과 시탕은 경전공부에 앞서는 좋은 품성을 만드는 참교육이었다 왕세자는 스승에게 제자로서의 예를 깍듯이 차려야만 했다 왕세자가 성균관에서 입학례를 치를 때, 왕세자에게는 책상이 제공되지 않았다 스승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바닥에 놓인 책을 읽어야만 했다 - 지덕체에 균형을 갖춘 왕세자를 키워라 정조는 문무에 능한 군주였다 50발을 쏴서 49발을 명중시킬 정도로 활쏘기에 능했다 또한 개인문집 홍재전서를 180여 권, 4천 여권의 서적을 편찬할 정도로 뛰어난 학식을 자랑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종묘제례악을 하룻밤 만에 작곡했다고 전해진다 세종은 조선 초기 학술, 문화, 과학, 군사 부분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어떻게 세종, 정조와 같은 왕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왕세자는 지덕체가 균형을 이루는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조선의 사대부가 갖춰야 할 기본 교양으로서의 육예(六藝)는 예, 악, 서, 어, 서, 수로 구성된다 예는 예법, 악은 음악, 서는 글쓰기, 사는 활쏘기, 어는 말타기, 수는 수학을 의미한다 왕세자는 육예에 고루 능한 교양인으로 성장해야 했다 육예는 오늘날 교육의 지덕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신역사스페셜 31회 – 조선판 공부의 신, 왕세자 교육 (2010 3 27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