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시121김소월의 개여울, 이별의 슬픔과 재회의 소망이 담긴~

힐링시121김소월의 개여울, 이별의 슬픔과 재회의 소망이 담긴~

개여울은 개울(작은 시내)의 여울목, 개울의 폭이 좁아져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곳을 뜻한다 시인은 관찰자이고 시의 주인공은 당신으로 지칭되는 여인이다 시인은 그 여인에게 당신은 무슨 이유로 혼자 개여울에 나와 앉아 있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시인 스스로 그 여인의 입장에서 대답한다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이 봄바람에 해적이는 좋은 때에 여인은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여인은 이맘때 사랑하는 임과 이별을 했고 그래서 개여울에 나와 그 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임은 떠나면서 아주 가는 것이 아니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래서 여인은 그 말을 부디 자기를 잊지 말고 기다려 달라는 뜻으로 알고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이 시는 개인적인 이별의 슬픔과 재회에 대한 소망을 그리고 있다 한편 시인이 살던 시대와 관련하여 시의 의미를 확대할 수도 있다 1920년대 일제 강점기 때에 고향에서 살 수 없어 고향을 등지고 떠나야 했던 사람과 그들을 떠나보낸 사람의 아픈 이야기가 담겨 있다 먹고 살 길이 없어 고향을 떠나면서 돈 벌어서 곧 돌아올 테니 부디 잊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약속하고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계절은 바뀌었다 봄이 돌아와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와도 떠난 사람은 소식이 없다 남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려는 듯 잔물(결)은 봄바람에 이리저리 오가며 찰싹거린다 떠난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여인, 그 여인의 안타까운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이 시 ‘개여울’은 1967년에 이희목 작곡으로 노래로 만들어져 김정희(1967), 허림(1972), 정미조(1972) 등이 불렀다 처음 노래로 불렸을 때 큰 인기를 얻었지만 가수 개인의 활동 중단으로 잊혀졌다가 1972년 정미조가 이 노래를 부르면서 다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김소월(金素月, 1902년 9월 7일~1934년 12월 24일) 그는 일제 강점기 시인으로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이지만, 호인 소월(素月)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34년 12월 24일 평안북도 곽산 자택에서 향년 33세로 병사한 그는 서구 문학이 범람하던 시대에 민족 고유의 정서에 기반한 시를 쓴 민족 시인이다 그는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출생하여 곽산군에서 성장하였다 1904년 처가로 가던 부친 김성도는 정주군과 곽산군을 잇는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당한 후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이후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조부의 손에서 자랐다 그는 곽산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조만식과 김억을 만났다 김억의 격려를 받아 1920년 동인지 ‘창조’ 5호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5년에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을 발간했다 오산학교 시절에 김소월은 3살 많은 ‘오순’을 알게 됐다 둘은 서로 의지하고 상처를 보듬어주며 사랑했다 그러나 그 행복은 너무나 짧았다 오산학교 재학 중인 1916년 14살 때, 할아버지 친구의 손녀인 홍단실과 혼인했다 그 후 오순은 19살 때 다른 사람과 혼인했다 오순의 남편은 의처증이 심했고 폭력을 일삼아서 결국 오순은 이로 인해 사망하게 되었다 소월은 아픈 마음을 안고 오순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이때 오순을 기리며 적은 시가 초혼(招魂)이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해서 졸업했다 1923년에는 일본 도쿄 상과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이 무렵 서울에서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고 ‘영대’ 동인으로 활동했다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도왔으나 일이 실패하자 처가인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구성군 남시면에서 개설한 동아일보 지국마저 실패하는 바람에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다 본래 예민했던 그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는 류머티즘으로 고생을 하다가 1934년 12월 24일 평안북도 곽산에서 뇌졸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33세였다 조병춘은 “우리 민족의 문학적 생리에 배겨 있는 민중적, 민요적 리듬을 가장 적절하게 건드려 준 시인”이라고 했다 김현은 김소월의 시가 “전래의 정한의 세계를 새로운 리듬으로 표현해 낸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민요에 속한다 ”고 했다 김소월은 한국의 전통적인 한(恨)을 노래한 시인이며 짙은 향토성을 전통적인 서정으로 노래한 시인이다 1981년 금관문화훈장(1등급)이 추서되었으며 서울 남산에 그를 기리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