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장 31~46절 /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기준 / 김성우 목사(강변동숭교회)

마태복음 25장 31~46절 /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기준 / 김성우 목사(강변동숭교회)

마태복음 25장 31~46절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기준 김성우 목사(강변동숭교회) www.dsriverside.com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천국에 관한 예수님의 마지막 세 번째 비유가 양과 염소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목자가 양과 염소를 나누듯이 우리 또한 양과 염소로 나누신다고 말씀합니다. 양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 칭찬을 듣고 염소는 호되게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양과 염소를 나누는 기준이 뭘까요?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푼 선들입니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는 나보다 약한 자들입니다. 힘없고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입니다. 내 곁에 무심코 지나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푼 선은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않고 베푼 선입니다. 내가 뭔가 얻기 위해 베푼 선이 아니라 우리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선들입니다. 우리 삶에서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내 삶에서 배어 나오는 친절입니다. 이런 선들은 어떤 목적을 갖고 베푸는 선이 아니라 그냥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입니다. 얼마 전에 이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소년 가장인 형에게 어린 동생이 치킨을 먹고 싶다고 졸랐지만 형은 돈이 5,000원밖에 없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치킨 집 사장님께 사정을 말하자 사장님께서 공짜로 치킨을 주면서 앞으로도 동생과 먹고 싶으면 와서 먹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학생이 너무나 고마웠지만 갚을 길이 없어 치킨 프렌차이즈 업체에 감사의 손 편지를 보내면서 이 선행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푼 선입니다. 이런 선은 어떤 목적을 가진 선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고통 받는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살리려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가운데 죽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과 은혜를 안다면 우리도 이런 사랑을 베풀고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양과 염소로 나누는 이유는 하나님 사랑과 은혜를 안다면 우리 또한 이런 선행과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들이 하나님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여전히 나만을 위해 살고 선을 베풀지 않는다는 것은 받은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내 삶이 이전과 다를 바가 없다면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내 믿음이 가짜일수도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생각이 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무시했습니다. 아마도 도와봤자 자신들에게 돌아올 게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괜히 인생의 짐만 될 것 같아 외면한 것입니다.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을 희생하고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줍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푼 것이고 하나님은 이런 자를 인정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염소가 섞여 있습니다. 이런 염소는 선을 베풀어도 이것저것 다 따집니다. 누군가에게 베풀 때에도 나에게 돌아오는 것을 따져보고 나에게 유익이 없다 싶으면 베풀지 않습니다. 이것은 선이 아니라 나를 위해 투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나에게 유익하다 싶으면 선을 베풉니다. 사람들과 인정과 칭찬이 있으면 앞장서서 행합니다. 작은 자는 외면하고 오히려 지극히 큰 자만 돕습니다. 그래야 나에게 돌아오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 역시 나를 위한 이기적인 투자일 뿐입니다. 이런 자들이 염소로 분류됩니다. 우리가 선을 베풀 때 그 어떤 목적이나 대가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거저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거저 나눠줘야 합니다. 우릴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 또한 그냥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사랑이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그냥 흘러나와야 합니다. 손익만을 따지기보다 받은 사랑을 생각하고 그냥 베풀고 나눠야 합니다. 이처럼 의도하지 않은 선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랑을 하나님은 다 기억하시고 양들로 분류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곁을 스쳐지나가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지극히 작은 자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그 사람을 운전하다가 만날 수 있고, 음식을 배달시키다가 만날 수도 있고, 길거리에서 부딪히며 만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들이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무의식 가운데 행하는 나의 모습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의도적으로 친절을 베푼 사람들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으십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으로 이미 보상을 다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부지불식간에 행한 일들을 주로 평가하십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게 했던 선에 대해서 평가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본심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사랑의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곁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모든 자들이 나에게 지극히 작은 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행하는 나의 모습을 보십니다. 그리로 나를 양과 염소로 구분할 것입니다. [묵상과 적용] 내 곁을 지나치는 모든 사람들 안에 예수님이 거하신다고 생각해 봅시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내가 바뀌어야 할 행동은 무엇입니까? 무의식적으로 행동할 때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신다고 생각해 봅시다. [기도] 나의 모든 행동과 말이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되게 하시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예수님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