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 26 수요예배_풍상한삶의기초(16)
#세종시교회 #백현우목사 #세종빛과소금교회 #예배영상 #영상예배 #수요예배 #실시간예배 #실시간예배중계 #풍성한삶의기초 참고: 「풍성한 삶의 기초」 김형국목사 저 공동체적 삶의 원리: 섬김의 도 사랑하라는 말은 쉽지만, 그 사랑을 실생활에서 행동에 옮기는 것은 결단과 학습,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일에서 성장해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성숙한 정도는 사랑의 전문가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배운 사랑이 제2의 천성으로 자리 잡은 이들이 많을수록 그 공동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 분의 뜻을 이뤄가게 됩니다.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삶의 원리는 ‘3장 16절’로 요약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3장16절 이고, 나머지 하나는 요한일서 3장16절 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그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3:16) 요한일서는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요일3:16) 대개 요한복음의 말씀은 암송도 하고 익숙하지만, 요한일서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을 받는 것은 좋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버겁게 느낍니다. 우리의 신앙에 요한복음 3장16절만 있고, 요한일서 3장16절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희생은 없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것을 내어주지 않는 신앙인은 존재할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5-28절 이 본문 바로 앞에는, 제자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서로 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곁에 불러놓고 “너희는 참 특별한 공동체”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물론 리더십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끌고, 건강한 권위를 사용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자기 유익을 따라, 자기 욕심을 따라, 자기 마음대로 리더십을 사용하고, 자기가 가진 권세를 마구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세상 공동체의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세상 공동체는 피라미드 조직과 같습니다. 맨 밑에는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사람이 있고, 맨 꼭대기에는 권세와 힘을 독점하고 모든 것을 지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점에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아갑니다. 갑과 을로 구성된 연쇄 고리가 이 피라미드를 채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위 ‘갑질’ 을 당한 사람은 자신의 을에게 갑이 되어서 이런 ‘갑질’을 또다시 반복합니다. 그 때문에 이러한 구조에서는, 공동체의 아래쪽에 위치한 약자들은 을의 을이 되어서 많은 고통을 감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고 하십니다. 여기서 ‘너희’는 하나님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오히려 거꾸로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맨 꼭대기에 올라가고 싶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낮아져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역피라미드 구조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28절에서는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주려고 왔다”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제일 많이 섬기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기까지 섬기셨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거꾸로 된 나라’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권세를 부리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리더가 됩니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가 깨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리더가 섬기려 하지 않고 섬김을 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와 정반대입니다. 교회에서 리더들이 자기 권위를 주장하고 자기 힘을 주장하고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할 때, 교회는 추하고 깨진 모습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한 공동체는 예수님이 세우신 공동체가 아니라 사람의 방식으로 움직이는 인간의 조직에 불과합니다. 서로 복종하는 삶 하나님의 공동체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리더가 있습니다. 리더는 예수님과 같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워진 리더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성경은 섬김과 함께 순종의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젊은이 여러분, 이와 같이 여러분도 나이가 많은 이들에게 복종하십시오. 모두가 서로서로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벧전5:5) 하나님은 공동체에 지도자들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리더들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해서 희생하며, 그들을 섬겨야 하고 리더를 따르는 자들은 그 리더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양극단의 모습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한쪽 극단은 유교주의 전통을 가지고 목사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경우입니다. 목사가 하는 말이라면 무슨 이야기를 해도 다 순종하는 것은, 유교 전통에서 나온 잘못된 모습입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내용을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성도들이 목사님에게 “그것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라고 겸손히 질문해야 합니다. 자신의 지식이 부족하여서 오해할 수 있으니 쉽게 판단하기 보다 겸손히 질문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성도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입니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극단에는 어차피 주 안에서 한 형제자매이니 목사와 성도가 아무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도 건강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권위를 주셨습니다. 목사만이 아니라 순장이나 소그룹 리더에게도 그에게 걸맞은 지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모두가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영적 성숙도와 공동체에 대한 헌신에 따라 권위가 다르게 주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다수결을 따라가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공동체에서 가장 이상적인 의사결정은 모든 공동체 구성원이 자신의 의견을 내놓고 충분히 소통하면서 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모아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안이 그렇게 이상적으로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충분히 논의하고 의견을 수렴한 후 다수의 의견이 아니라 소수의 의견을 따라 리더가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리더가 또는 리더들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하나님 앞에서 분별하고 결정할 때, 모든 공동체 구성원은 여기에 함께 순종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공동체에서 “내 취향이 아니야. 난 내 생각이 있어. 그건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야. 나는...나는...” 이라고 말하며, ‘나’에 매여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성장하기 어려울뿐더러, 리더가 되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리더들도 불완전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그 리더를 우리에게 붙여주셨다면 리더의 지도와 인도대로 따라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겸손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기둥: 용서 사랑하면 서로 가까워지기 마련인데, 멀리서는 다 괜찮아 보이지만 가까워지면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상대방의 부족한 부분과 상대방의 잘못하는 일이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그런 일은 우리를 참 고통스럽게 합니다. 차라리 인사만 하고 지나치는 관계에서는 별 문제가 없지만, 서로 사랑하려고 가까이 가면 서로 오해하고 잘못하는 일들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마태복음 18장 20-30을 통해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도대체 몇이나 참아야 합니까? 내가 여섯 번 정도 참았는데, 예수님, 일곱 번 참을까요?”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참아라” 라고 대답하십니다. 이것은 결국 무한대로, 무조건 참아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 이야기를 하십니다. 1달란트는 15년 품삯입니다. 만달란트는 15만년 품삯입니다. 계산하기도 어려운 엄청난 액수입니다. 주인은 이렇게 큰 빚을 진 자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를 가엾게 여겨서 모든 빚을 탕감해줍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나가면서 자신에게 백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잡아 돈을 갚으라고 하고, 조금만 참아달라는 그의 말을 거절하고 그를 옥에 집어넣었습니다. 1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므로 백 데나리온은 100일의 품삯입니다. 결코 적은 돈은 아니지만, 만 달란트와 비교되지 않는 액수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잘못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것은 백 데나리온에 불과합니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우리는 만 달란트를 탕감받았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죄를 용서받았는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물론 용서는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감정이나 자존심을 계속 건드리는 사람, 우리한테 해서는 안될 행동과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너무나 상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도 그와 비슷한 태도로 주님을 대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주님께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면서 그분을 무시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고 기다려 주십니다. 백 데나리온만큼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늘 만 달란트를 용서해주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자신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용서를 기억하고 묵상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만 달란트 탕감받은 것을 기억하고 주님을 바라보며 묵상할 때,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