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태종 10만군을 격파한 양만춘의 안시성
#안시성 #양만춘 #윤명철 645년 고구려와 당나라는 전쟁을 벌였다. 당 태종은 요동성을 점령한 후에 남쪽으로 내려와 백암성에서 성주의 항복을 받았고, 이어 안시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와 말갈 혼성군인 15만 명을 구원군으로서 파견했다. 하지만 주필산 주변에서 대패해 36,800명이 포로로 잡히고, 이 때 말갈병 3300명은 생매장 당한다. 안시성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다. 당나라군은 이동식 공격무기인 포차로 성의 누각과 성가퀴(雉牒)를 무너뜨렸다. 그러면 고구려 군대는 그 위에 토담과 목책을 세워 저항을 했다. 하루에 6~7회의 공방전을 벌이는 치열한 전투였다. 당태종은 군사들을 독려해가며 60일 동안 무려 50만 명을 동원하여 성의 동남쪽에 인공으로 토산을 쌓았다. 하지만 거의 완성되어 공격을 가할 즈음에 갑자기 토산이 무너졌다. 일대혼란이 생겼고, 이 틈을 탄 고구려군은 날래게 성벽을 넘어가 토산을 점령하였다. 당나라는 패배를 거듭하고 9월이 되면서 날씨가 추워지고, 군량미가 떨어져 전쟁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다. 당태종은 추위를 핑계삼아 황급하게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당태종은 한겨울로 접어든 음력 10월의 요택지대에 빠져 처절하게 고통을 받은 사실들이 삼국사기와 자치통감 등에 기록되어있다. 그는 태자인 당고종이 보낸 결사대에 의해 구원받아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채 돌아왔다. 말은 10의 8,9가 얼어죽었다 .당태종은 이렇게 탄식했다. ‘위징이 살아있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을 ----’. 그만큼 고구려는 중국인들에게 무서운 경쟁상대였다. 신당서에는 안시성은 지형이 험하고 무리들이 사납다고 기록하였다. 고구려는 국가 시스템, 기술력, 무엇보다도 양만춘이라는 인물의 탁월한 지도력과 고구려인들이 지닌 자유의지가 기적같은 승리를 획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