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충사文忠祠 Munchungsa 문화재자료제4호 일제강점기 순국殉國 송병선宋秉璿 송병순宋秉珣 사우祠宇 영정影幀 용동서원龍洞書院 충신정려각忠臣旌閭閣 동구 용운동

문충사文忠祠 Munchungsa 문화재자료제4호 일제강점기 순국殉國 송병선宋秉璿 송병순宋秉珣 사우祠宇 영정影幀 용동서원龍洞書院 충신정려각忠臣旌閭閣 동구 용운동

대전광역시 문화유산자료 문충사(文忠祠) Munchungsa 종목 문화재자료 (구) 제4호 (1989년 3월 18일 지정) 수량 1동 52 7m2 시대 일제강점기 위치 대전 동구 동부로 73번 길 44 (우) 34663(지번) 용운동 356-1 유학자 송병선(宋秉璿, 1836∼1905) 송병순(宋秉珣, 1839∼1912) 형제의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사우(祠宇)이다 1989년 3월 18일 대전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었다 사우는 앞면 3칸, 옆면 2칸 크기에 맞배 기와지붕을 올렸으며, 간결한 익공계(翼工系) 건축양식으로 지었다 건물 입구 쪽에 홍살문(紅-門)과 충신정려각(忠臣旌閭閣)이 있고, 경내에는 문충사(文忠祠), 용동서원(龍洞書院)과 외삼문(外三門)이 있다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은 우암 송시열 선생의 9대 손으로 학문이 뛰어나 천거(薦擧)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9세기말 외세가 물밀듯이 들어와 나라의 앞날이 어려워지자 근사속록(近思續錄)을 간행하였다 1905년 불법적인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었을 때는 고종에게 조약 파기와 을사 5적을 처단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다시 고종을 만나려다가 일본 헌병들에게 체포되었는데 상소문을 올리고 음독 자결하였다 송병순(宋秉珣, 1839~1912)은 고종 25년(1888)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다가 불법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을 성토하는 글을 지어 전국에 배포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의 슬픈 소식을 듣고 두문불출하다가 끝내 형과 같이 음독 자결하였다 원래 이 사당(祠堂)은 1908년 충북 영동에 있던 것인데, 1966년 송병선 선생의 추모 60주년을 맞아 선생이 태어나고 순국(殉國)한 이곳으로 옮겼다 또한 1970년 강당인 용동서원을 세워 서원 건축 양식을 갖추게 되었다 입구에 홍살문이 서 있고, 그 옆에 정면 5칸, 측면 1칸의 솟을대문인 외삼문 안에 용동서원(龍洞書院) 현판이 걸린 강당이 있으며, 그 뒤의 내삼문 안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이 있다 용동서원은 1970년에 건립되었는데, 조선시대의 서원 건축양식을 그대로 따랐다 상훈과 추모 송병선(宋秉璿, 1836~1905)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914년 왕명으로 영동에 문충사(文忠祠)를 지어 동생 송병순과 함께 배향했으며, 1965년에 충청남도 대전 보문산으로 이전하였다 1966년 전국 유림들이 뜻을 모아 대전시 용운동에 용동서원(龍洞書院)을 짓고 이곳에 문충사를 이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상훈과 추모 송병순(宋秉珣, 1839~1912) 1914년 왕명으로 영동에 문충사(文忠祠)를 지어 형 송병선과 함께 배향했으며, 1966년 전국 유림들이 뜻을 모아 대전시 용운동에 용동서원(龍洞書院)을 짓고 이 곳으로 문충사를 옮기었다 1973년 영동역 앞에 ‘순국의사심석재송선생병순지상 (殉國義士心石齋宋先生秉珣之像)'이라 이름 붙여진 동상이 세워졌다 1968년에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송병선정려각 宋秉璿旌閭閣 대전광역시 동구 동부로73번길 44 (지번)대전 동구 용운동 356-1 여적 餘滴 문충사의 보물 송병선(宋秉璿, 1836~1905) 송병순(宋秉珣, 1839∼1912) 두 분 선생 영정(影幀) 촬영을 허락해 주신 어르신께 심심 사의를 표합니다 취재 2024-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