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복음 (누가복음 15:11-24) --- 안성삼목사 주일설교 - 목자들의교회 - 2024/11/17
광고 없이 설교 듣기: 설교 요약: 이 비유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입니다 (1-2절) 유대 나라의 사람들이 최고로 죄악시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인 세리, 창녀, 죄인들인데 - 이들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존재로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하시자 하필이면 이런 사람들이 그 은혜로운 말씀에 끌려서 주님 주변에 몰려들었고 식사 좌석까지 함께하는 불편한 장면을 보이게 됩니다 드디어 저들은 원망의 소리를 발하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평가에 의하면 바리새인 서기관은 율법주의자들의 대표로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요, 세리 창녀 죄인은 복음을 믿고 구원 받은 자들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이런 전제 아래서 볼 때 [탕자의 비유]는 [탕자의 복음]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보여준 아버지의 모습에서 3가지 복음의 내용을 찾아 나누고자 합니다 1 잘못을 범할 때도 (아버지)하나님과의 교제는 끊어지지 않는다 2 잘못을 범할 때도 (아버지)하나님은 우리에게 실망치 않으신다 3 잘못을 회개 해야만 (아버지)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것이 아니다 1 잘못을 범할 때도 (아버지)하나님과의 교제는 끊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과 사이(교제)가 멀어졌다 " 는 상투적인 말을 종종 듣습니다 교제 fellowship라는 단어는 ‘친밀함, 연합됨, 하나됨’ 이라는 의미로서 꽤 영적인 말처럼 들립니다만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기로 작정할 때 그분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진리가 사실이라면 이미 우리 안에 사시는 분과 우리가 나뉘거나 멀어질 수 없습니다 즉 우리가 잘못된 행동을 할때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될 수 있다는 생각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젊은 탕자가 먼 타국으로 떠났을 때 아버지는 어떠했습니까? 이때부터 아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습니까? 아들에 대한 마음이 변했던가요? 성경은 그러한 가능성조차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나 방황할 때, 자신이 아들로서 누리던 특권을 스스로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입장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본문의 주인공은 [둘째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넓은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생각]과 [사실]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가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만나러 그저 맨발로 뛰어나가 사랑을 표현했을 뿐,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얼싸안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요한일서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아버지와의 유대관계는 우리의 행동이 아닌, 아버지의 은혜로 결정됩니다 때로 교제가 단절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아도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삶의 여러 부분에서 실패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진실의 기준은 우리의 감정이 아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약속에 있습니다 교제의 초점은 아버지이지 아들이 아닙니다 2 잘못을 범할 때도 (아버지)하나님은 우리에게 실망치 않으신다 [우리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실망하신다]는 말은 현대 교회에서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는 데 [죄책감 티켓]으로 꾸준히 이용되어 온 표현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우리가 죄책감에 빠져 나오ㅓ지 못하도록 이 말을 자주 사용해 왔습니다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그 일만을 골라서 하십시오!" “하나님이 실망하지 않도록 그분의 뜻에 따라 바로 살아가십시오 ”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특정 결과를 기대했는데 그럴듯한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실망스럽다 "는 표현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실망할 수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이 결과를 모르는 채, 기다리면서 그가 원하는 방향대로 일이 진행되기를 바라고 있다 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맞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 것도 바라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세상의 죄를 대신해 돌아가셨을 때 우리가 저지를 죄 하나하나를 분명히 보셨습니다 그는 평생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지를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나 자신에게 실망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 실망하실 수 없습니다 종교에서 도덕적 삶은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친밀하게 알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7:3)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그리스도인의 삶' 을 살아보려고 노력할수록 실패할 수밖에 없는 수준입니다 간난 아이가 품안에서 똥 오줌을 싼다고 실망할 부모는 없습니다 그럴 수준임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탕자의 아버지를 통해 성부 하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실망한 아버지의 반응이라고 보십니까? 아버지에게는 실망의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3 잘못을 회개 해야만 (아버지)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것이 아니다 현대 교회에 만연한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은 우리 행동에 따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반응하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셨고, 그 결과 우리들 쪽에서 그에게 반응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흔히 [회개]가 우리 삶에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의 율법적인 가르침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때문에 신약은 구약의 상황과는 판이하게 달라졌습니다 구약처럼 하나님의 선하신 축복을 받기 위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선한 일 때문에 우리가 감격하여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책]과 [회개]를 혼동하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몸부림치지 않는다면 진짜 회개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회개해야만 하나님이 우리 삶에 주시는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다 '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와 사뭇 다릅니다 [메타노이아](회개) 는 ‘어떤 문제를 잘 살펴본 후 생각을 달리하다' 즉 ‘생각을 180도로 바꾼다’는 뜻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어쩔줄 모르면서 죄책감과 부끄러움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로마서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표현하시고 우리가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은혜의 공식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축복의 원천은 그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메시지에 있습니다 탕자는 회개하기 전에 아버지의 넓은 사랑의 인격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누가 끌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께로 갑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회개를 조건으로 축복을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축복을 베풀고서 다만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해하는 방식부터 바꿔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