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5일 그분의교회 주일 설교. "나의 기뻐하시는 금식" (이사야 58:1-9)

2024년 8월 25일 그분의교회 주일 설교. "나의 기뻐하시는 금식" (이사야 58:1-9)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은 기도하면 모두 응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참 좋겠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도를 모두 응답 받는다.” 라는 생각은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로 해석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기도하는 자가 언제나 하나님께 참되고 진실된 것만을 구하였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설령 우리가 이렇게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그 기도가 언제나 즉각적으로 빠른 시간 안에 응답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진실하고 참된 기도라 할지라도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의 때와 방법을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오랫동안 때로는 수십년 동안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셨다가 그분의 때에 응답하시는 경우도 매우 많습니다. 때로는 거의 무응답에 가까운 응답일 경우도 많습니다. 이럴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서 응답을 안하셨다.” 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신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기도하면 모두 응답을 받는다.” 라거나 또는 “모든 기도가 언제나 빠르게 응답을 받는다.” 라는 것은 본인의 생각이 그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도가 언제나 참되고 진실하다 할지라도 그 기도의 응답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어서 우리는 기도 응답의 결과나 때를 함부로 예측하면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실제로 우리는 언제나 참되고 진실되게 기도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는 언제나 옳지 않음과 부당함이 끼어들 여지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는 차라리 구하지 말았어야 할 것을 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우리는 기도를 할 때에 하나님께서 전혀 원치 않는 방식이나 방법을 취할 때도 있습니다. 이 원치 않는 방법 속에는, 기도의 행위 자체가 원치 않는 방법일 수도 있고 또는 기도 행위를 포함한 전반적인 삶이 원인이 되어 자신의 기도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하면서도 “자신의 기도는 언제나 응답을 받는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기도한 것을 언제나 응답받는다 라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응답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기도에 대하여 자신이 주관적으로 오해하고 판단하여 내린 결론일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늘 주의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 할 때에 언제나 참되고 진실하게 구하기를 힘써야 하며, 또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한 그렇게 구했다 할지라도 그 기도의 시행이 언제나 하나님의 판단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놓치면 안 됩니다. 조금 전에 제가 “우리의 기도 속에는 언제나 옳지 않음과 부당함이 끼어들 여지가 많고, 우리는 때론 차라리 구하지 말았어야 할 것을 구하는 경우도 많고, 그리고 심지어 우리는 기도를 할 때도 하나님께서 전혀 원치 않는 방식이나 방법을 취할 때도 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과연 그럴까?” “과연 나의 기도가 그렇게 잘못될 수 있나?” 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얼마든지 이런 기도의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가능성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본문이 알려줍니다. 본문에 그런 기도를 했던 부류들이 등장합니다.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만일 우리가 본문을 읽을 때 앞뒤의 문맥을 읽지 않고 이 구절만 딱 떼서 읽는다면 이 말은 참으로 듣기 좋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는 말 같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하고, 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다는 이런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정말 칭찬하시는 말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몇 줄만 더 읽어보시면 “어! 그게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어올 겁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실제로 정말 이런 백성이었다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마치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날마다 찾는 것처럼, 마치 의를 행하는 것처럼, 마치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것처럼 겉으로만 그렇게 행동했다는 말입니다. 즉 이 말은 그들이 실상은 그렇지 않으면서 말만 그럴듯하게 거룩한 척 드리고 겉으로만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척 그렇게 꾸몄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분명히 종교적으로 열정도 있었고 열의도 있었지만 이들의 이런 열심들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기도와 연관해서 나타납니다. 그들은 아마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을 찾고 날마다 의를 행하고, 물론 이 의는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의가 아니라 자신들이 만들어낸 종교적 의입니다만,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의 규례를 행하는데 어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가?” 이것이 이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 그들의 의를 행한다는 것, 그들이 하나님의 규례를 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한 가지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금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금식을 통해 하나님을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금식을 통해 날마다 의를 행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금식을 통해 하나님의 규례를 행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듣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그들이 하나님께 항의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기도하는데 왜 듣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 왜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 이런 이들의 태도가 묻어나옵니다.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아까 제가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도, 또한 우리가 나름 참되고 진실되게 기도한다고 해도 우리의 기도에는 언제나 오류와 부당함이 끼어들 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했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게 응답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보라 과연 너희가 어떠했는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기도에 침묵하시자 금식으로 하나님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금식은, 쉬운 예를 들면 엄마가 뭐를 안 사주니까 애가 밥을 안 먹는 것과 같습니다. “엄마가 사줄 때까지 밥을 먹지 않겠다.” 라는 것은 금식이 아니라 떼쓰기입니다. 일종의 하나님께 대한 압박성 항의 입니다. 그런 항의성 태도로 금식을 하면서 그들은 금식하며 하나님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도무지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금식이 이런 금식이었기에 그 금식은 금식 자체도 부당했습니다. 이들의 금식이 결코 참되고 진실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의 금식은 텅 빈 금식이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 대한 진지함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금식이었습니다. 과연 그들의 금식이 어떠했는가를 3절이 알려줍니다. 3절은 “그들이 자신들의 금식의 날에 오락을 찾았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오락’이라는 것은 요즘 말하는 레크레이션이나, 어떤 놀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금식을 하고 스스로 응답을 확신하여 미리 즐거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이들이 금식을 하고 “우리가 이만큼 금식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실거야” 라고 미리 예측하며 응답을 확신하여 즐거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그들의 금식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삶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그들은 금식을 한답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해야 할 일까지 가중시켰습니다. 그들이 금식을 했으니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금식을 했으니 아마도 육체적으로 지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그런 피곤함을 정당하게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 금식까지하며 육체적으로 힘들어 있으니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시키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이런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이만큼 했으니 나의 이런 주장은 당연한거야. 나에게는 얼마든지 그럴 권리가 있어. 내가 하나님께 애쓴 만큼 나의 수고나 책임을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것은 괜찮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들은 금식을 했으니 자기들의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게 하는 것은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그들은 금식을 하면서, 다투고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서로 치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4절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투고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서로 치는 일이 물리적인 폭력을 말할 수도 있고 또는 서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다투고 분쟁하는 것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진정으로 기뻐하는 금식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십니다. 이것이 6절과 7절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말은 하나님께는, 밥을 안 먹는 행위 자체가 금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필요에 따라서 음식 섭취를 중단하고 금식이라는 행위를 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래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