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추목 124  by 광장에서 선 하나님 by 톰 라이트 #하나님나라 #예수그리스도 #복음 #거룩한독서 #바울 #성경과포스트모던  #빌라도와가이사 #하나님과세상권력 #믿음과율법

책추목 124 by 광장에서 선 하나님 by 톰 라이트 #하나님나라 #예수그리스도 #복음 #거룩한독서 #바울 #성경과포스트모던 #빌라도와가이사 #하나님과세상권력 #믿음과율법

소개 기독교와 권력은 어떤 관계인가? 교회는 왜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그들의 책임을 상기시켜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목소리를 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이 공적인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정의와 평화의 새로운 구조를 이 사회에 창출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톰 라이트는 성경의 진리들을 충실하게 해석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공적 광장에서 배제하는 오늘날의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우리가 직면한 정치적?윤리적 난제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그 해결 방향을 제시한다. 지은이: 톰 라이트 저자 탁월한 신약학자, 초기 기독교 역사에 정통한 역사가, 목회 현장과 성도들의 삶에 깊이 관심하는 사제이다. 1948년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에서 수학하고(BA, DD) 케임브리지, 맥길,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신약성서학을 가르쳤으며, 웨스트민스터 참사회원 신학자이자 영국 성공회 더럼 주교를 역임했다 목차 서문 1장. 내일의 세상에서 바울과 성경 2장. 성경과 포스트모던 세계 3장. 빌라도와 가이사와 성경의 진리 4장. 하나님과 세상 권력과 테러 5장. 권력과 믿음과 율법 6장. 하나님과 권력과 인간 번영 7장. 어리석은 권세의 세상 속, 하나님의 능력 있는 미련함 8장. 평시와 전시의 기독교 미덕 9장. 공적인 삶에서의 기독교 신앙 10장.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 그때나 지금이 책 본문 책속에서 P.19~20 프랑스와 미국처럼 종교와 실제 삶의 분리를 아예 헌법에다 못 박아 놓은 국가들도 있다. 영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종교와 삶의 절대적인 분리를 희망한다. 그뿐 아니라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안락사를 시행함으로써 다락방 늙은이를 완전히 제거해 버리기를 바란다. 대학교와 대학의 부속 예배당을 콘서트홀로 바꾸고, 신학 교육을 폐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 지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라는 글귀를 지워 버리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영국에는 학생들의 공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모든 표식들을 말끔히 제거해 버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P.45~46 “자네,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 젊은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제3세계에서 개발 사역자가 될 겁니다.” 학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경제학 책을 읽지 않는 건가?” 학장이 이렇게 묻자, 학생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신학이 훨씬 더 관련성이 높으니까요.” 학생 말이 맞다. 경제학자에게는 아무 답이 없다. 경제는 자동차의 엔진과 같다. 경제학자들은 엔진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엔진을 청소하고 고칠 수 있는지 말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차를 몰고 어디로 가야 할지는 말해 줄 수 없다. 필연적으로, 같은 원리가 진보와 계몽주의에도 적용된다. 모든 사람의 해방이라는 것이 알고 보니 다른 누군가를 노예화하는 일이었다. 모든 사람의 경제 호황이라는 것이 알고 보니 다른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했다. P.95~96 포스트모더니티는 필연적으로 이 모든 것을 더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았다. 진리 주장의 가면이 벗겨지면서 권력 주장이라는 민낯이 폭로되었다. 이것이 온갖 종류의 허튼소리와 중상모략을 위한 길을 열어 놓으면서, 문명화된 논쟁과 공적 담론이 전투태세로 돌입했다. 이편저편 할 것 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의 눈알을 파내려고 할퀴어 댄다. 포스트모더니티는 오만한 모더니티에게 그것의 모든 의가 언제나 더러운 누더기 더미에 불과했다는 것을 선포할 역할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나는 믿는다. 달리 말해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타락,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에 대응하는 세속주의적 등가물을 설교할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티에는 그 나쁜 소식에 뒤따르는 복음, 즉 좋은 소식이 없다. 그 큰 이야기들이 작은 파편들로 해체되고, 한때 강력했던 자아라는 개념이 찢겨서 서로 경쟁하는 충동들과 편견들로 나누어졌고, 진리 자체는 ‘이전보다 더 낯설어졌다.’ P.112~113 로마 역사가로서 나는 이 지점에서 기시감을 느낀다. 이것은 로마인들이 영국에서부터 흑해와 그 너머까지 뻗어 나갈 때 펼쳤던 논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모든 제국들은 자신이 정의, 자유, 평화를 가졌고, 그것들을 다른 모든 이들과 공유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부분적으로 철학과 문화에서 포스트모던 방식의 방향 전환이 이 대단한 제국주의적 꿈을 비웃기만 할 뿐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제국들의 특징은 해체의 무기를 휘두르며 도전들을 막아 내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다우닝 가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문서들을 조작하고 허튼소리를 내뱉는 것을 허용해, 테러와의 전쟁과 이라크 전쟁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우리를 설득했던 것과 같다. 그래서 모더니티를 통해서든 포스트모더니티를 통해서든 할 것 없이 우리는 세상을 다루기 위한 도덕적 방향성을 상실해 버렸다. P.166~167 아주 조금씩, 고대 이스라엘의 시인들과 선지자들은 세상이 하나님 나라가 되어 간다는 기묘한 가능성과 고통스럽게 씨름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저 위의 이정표와 저 아래의 이정표 사이에 붙들려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일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세상을 섬기는 다른 방식의 인간됨을 증거하는 어느 백성에 대한, 본질적으로 유대교적인 비전으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을 바탕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직접 제시한 실마리들을 따라서, 예수님의 참혹한 죽음을 단순히 비극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그 모든 고난이 몰려와 한데 어우러지는 지점으로 보았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그분의 나라 수도의 성벽 밖에서 이교도 권력자들에게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악이 자행할 수 있는 가장 사악한 것을 예수님에게 행했고, 예수님은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악의 힘을 소진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것 역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까닭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지극히 이른 시기부터 영문도 모른 채 그 사건에서 ‘공적인 하나님’을 목격했다고 감히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목격한 하나님은 발가벗겨진 하나님, 수치와 매질을 당하는 하나님, 군사적 힘의 권력이 아닌 사랑의 권능으로 십자가로부터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이었다. P.235 그러나 나는 신약성경의 독자로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쳤을 때의 그리고 예수님이 나라를 행하고 나라가 마침내 세워지도록 하기 위해 죽을 때의 그 나라는 법적인 성인들만이 사적으로 일견할 수 있는 종류의 나라가 아니라고 믿는다. 그 나라는 권세를 행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소식과 사실을 가지고 세상의 불한당들과 압제자들에게 맞서도록 의도된 나라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맞선 나라였다는 흔들리지 않는 강한 확신을 갖고 있다. 나는 무적의 기술력과 기능들로 무장한 채 어리석은 권세의 세상적인 일을 거듭 재현하려다가 파괴적인 실패로 점철된 근래 역사를 짊어진 서구 세계가 그 급진적인 대안을 좀더 일찍 돌아보았어야 했다고 믿는다. P.275 이 놀라운 주장을 보통 알아채지도 못하는 데는 두 가지 명확한 이유가 있다. 두 가지 이유가 다 ‘공적인 하나님을 실천하기’라는 도전, 즉 공적인 삶에서 그리스도의 신앙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야 하는가라는 도전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첫째, 그것은 믿기지가 않는다. 둘째,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첫째로, 예수님 당시와 그 이후 시대의 사람들은 예수님과 그분의 추종자들의 주장들에 대해 하나님 나라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고 말해 왔다. 그들은 창밖을 보라고 말한다. 신문을 읽어 보라고도 말한다. 만일 하나님이 친히 담당하고 계시다면, 왜 세상은 여전히 이 지경이란 말인가? P.184~185 대부분의 민주국가들이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선거에서 과반의 표를 얻는 것이 어떤 사람이나 정당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아무도 결코 도전할 수 없는 절대적 권리를 부여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임기를 마친 공직자들을 자주 심판대에 세웠다. P.235 그러나 나는 신약성경의 독자로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쳤을 때의 그리고 예수님이 나라를 행하고 나라가 마침내 세워지도록 하기 위해 죽을 때의 그 나라는 법적인 성인들만이 사적으로 일견할 수 있는 종류의 나라가 아니라고 믿는다. 그 나라는 권세를 행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소식과 사실을 가지고 세상의 불한당들과 압제자들에게 맞서도록 의도된 나라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맞선 나라였다는 흔들리지 않는 강한 확신을 갖고 있다. 나는 무적의 기술력과 기능들로 무장한 채 어리석은 권세의 세상적인 일을 거듭 재현하려다가 파괴적인 실패로 점철된 근래 역사를 짊어진 서구 세계가 그 급진적인 대안을 좀더 일찍 돌아보았어야 했다고 믿는다. P.275 이 놀라운 주장을 보통 알아채지도 못하는 데는 두 가지 명확한 이유가 있다. 두 가지 이유가 다 ‘공적인 하나님을 실천하기’라는 도전, 즉 공적인 삶에서 그리스도의 신앙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야 하는가라는 도전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첫째, 그것은 믿기지가 않는다. 둘째,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첫째로, 예수님 당시와 그 이후 시대의 사람들은 예수님과 그분의 추종자들의 주장들에 대해 하나님 나라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고 말해 왔다. 그들은 창밖을 보라고 말한다. 신문을 읽어 보라고도 말한다. 만일 하나님이 친히 담당하고 계시다면, 왜 세상은 여전히 이 지경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