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저산_사철가_사시풍경( 동초 김연수 )

이산저산_사철가_사시풍경( 동초 김연수 )

이산저산_사철가[四節歌] 동초 김연수 명창(1907 ~ 1974 3 9), 고수: 이정업 명인 이산 저산 꽃이 피면 삼림풍경(森林風景) 너른 곳 만자천홍(萬紫千紅) 그림병풍 앵가접무(鶯歌蝶舞) 좋은 풍류 세월 간줄을 모르게 되니 분명코 봄일러라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더라 나도 어제는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하네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한들 쓸 데 있나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네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 승화시라 옛부터 일렀으니, 작반등산(作伴登山) 탁족(濯足)놀이며 피서임천(臨川)에 목욕구경 여름이 가고 가을이된들 또한 경개 없을 손가 상엽홍어 이월화(霜葉紅於二月花)라 중양추색 용산음(重陽秋色龍山飮)과 한로상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잖는 황국단풍은 어떠허며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면 낙목한천 찬바람에 천산비조 끊어지고 만경인종 없어질적 백설이 펄펄 휘날리면 월백 설백 천지백 허니 모두가 백발의 벗일레라 그렁저렁 겨울이 가면 어느덧 또하나 연세는 더 허는디 봄은 찾아 왔다고 즐기더라 봄은 갔다가 연년이 오건만 이내 청춘은 한 번 가고 다시 올 줄을 모르는가 어화! 세상 벗님네들 인생이 비록 백년을 산대도 인수순약격석화(人壽瞬若擊石火)요 공수래 공수거를 짐작허시는 이가 몇몇인고 노세, 젊어 놀아, 늙어지면은 못노나니라 놀아도 너무 허망이 허면 늙어지면서 후회되리니 바쁠 때 일하고 한가할 때 틈타서 좋은 승지도 구경하며 할 일을 하면서 놀아보자 아래는 이 곡의 원래 창시자인 김연수 명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드라마틱한 녹음 당시의 상황을 정리한 것인데 읽어볼 만 합니다 -=-=-=-=-=-=-=-=-=-=-=-=-=-=- 50∼60년대의 판소리계를 석권하던 김연수 명창이 지어 부른 단가, 사철가의 내용입니다 사계절을 주제로 한 음악 하면 으레 우리는 비발디의 악곡 사계를 연상하지, 여기 김연수의 노래를 떠올리는 사람은 드물지요 아니 김연수의 사철가를 떠올리기는커녕 사철가라는 우리의 노래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게 우리의 실정입니다 얼른 생각해 보아도 부끄러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비단 외국의 예만이 아니라 우리의 시가(詩歌) 중에도 사계절을 읊조린 작품이 적지 않습니다 그중에서도 김연수 명창의 사철가는 인생론적인 애상을 짙게 풍겨 주어 단연 우리의 심금을 적셔 주는 엄지의 위치에 선다고 합니다 창해일속(滄海一粟)과 같은 인생은 비록 백 년을 산다고 해도 영원한 세월에 비하면 그야말로 격석화(擊石火)의 순간, 즉 번쩍이는 부싯돌의 순간과 같다고 전제하면서 계속 인생행로의 덧없음을 노래해 가는 저의는 인생을 허무주의적 페이소스로 체험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월백설백(月白雪白) 천지백(天地白)하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라고 자탄한 사설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사철가는 인생과 자연의 관조적 합일을 바탕으로 우리의 숙명적 유한성을 담담하게 객관화한 데 더욱 공감되는 감흥이 있습니다 이 같은 애상적 *포에지가 김연수 특유의 구성진 음악적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면서 한결 적절한 비애미를 짜 내고 있는 노래가 곧 사철가입니다 (*포에지 poésie : 시(詩)의 세계가 갖는 정취) 사실 단가 사철가는 김연수의 '백조의 노래'입니다 백조가 죽을 때는 마지막 노래를 남긴다는 전설처럼 김연수 명창은 죽기 전 이 사철가를 세상에 남겼습니다 그가 작고하기 얼마 전 당시 동양 방송 PD로 근무하던 필자는 김연수 명창을 모시고 방송 녹음을 했습니다 그때 그가 고수 이정업의 반주로 판소리 몇 대목과 함께 불러 준 노래가 사철가입니다 오랜만에 녹음하러 온 그의 모습은 다른 때와는 달리 초췌했습니다 녹음이 끝난 후 그는 전에 없던 주문을 해 왔습니다 방금 녹음한 사철가를 조용히 다시 들어 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녹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쁘다고 총총히 돌아가던 여느 때에 비하면 이변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조용한 사무실 한구석에 녹음기를 틀어 놓고 방금 녹음한 사철가를 육중한 침묵과 함께 들었습니다 사무실의 창살에는 희뿌연 석양이 쏟아지고 방송국 옆을 지나는 서소문 길 공항로에는 부질없이 분주하게 차량들이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인생이 비록 백 년을 산대도 인수순약 격석화요, 공수래 공수거를 짐작하시는 이가 몇몇인가'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아예 명창의 눈은 지그시 감겼고, 병색으로 창백해진 표정에는 깊은 우수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사철가가 끝나자 두 명인의 콤비는 말도 없이 사무실 문을 나섰습니다 얼마 후에 김연수 명창은 유명을 달리했고, 명창이 작고한 그 다음해에 당대의 명 고수 이정업 옹 역시 '저승에 가서도 북 반주를 해 달라'던 명창의 권을 좇아서인지 끝내 타계하고 말았습니다 사철가의 노래가 더욱 우수의 정념을 더해 주는 것은 바로 이처럼 '김연수 명창의 백조의 노래'였다는 간절한 사연이 묻어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명희(전 국립국악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