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 밝음과 어두움의 역사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와 스페인에 걸쳐 있는 이른바 산티아고 순례길에 다녀옵니다 과연 이 순례길이 생겨난 역사적 배경을 알고 가는 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 처음 조성되던 당시의 상황과 그 배경을 알아보죠 산티아고 순례길(카미노 데 산티아고, Camino de Santiago)의 역사는 유럽 중세 시대의 종교적, 사회적 배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순례길의 조성과 그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산티아고 순례길의 기원 성 야고보와 순례의 시작: 산티아고는 예수의 12사도 중 한 명인 성 야고보(세인트 제임스, Santiago)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성 야고보는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로마 제국 하의 이베리아반도(현 스페인)로 선교를 떠났다고 전해지며, 그의 유해가 스페인의 갈리시아 지방에 묻혔다는 전설이 생겨났습니다 다만 역사 자료로 확인되지 않는 전설일 뿐입니다 9세기 초, 스페인의 한 수도사(펠라요)가 별똥별이 떨어지는 곳에서 성 야고보의 유해를 발견했다고 한 뒤, 그곳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 세워졌습니다 성지로서의 발전: 12세기에 교왕 알렉산데르 3세가 로마 ‧ 예루살렘과 함께 산티아고를 기독교 세계 3대 순례지 중 하나로 공인하면서 국제적인 순례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2 당시의 역사적·사회적 배경은 이렇습니다 먼저 종교적 배경입니다 중세는 기독교가 유럽 사회를 지배하던 시기였으며, 순례는 신앙을 증명하고 죄를 용서받는 중요한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고, 로마로 가는 길은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위험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서유럽 내부의 성지였던 산티아고는 접근성이 좋았습니다 그 다음은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키스타(국토 회복 운동)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처음 조성되던 시기는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 간의 충돌이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711년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했지만, 9세기부터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 세력을 점차 몰아내는 레콩키스타가 진행되었습니다 산티아고의 성 야고보는 "이슬람 세력과 싸우는 기독교의 수호자"로 상징화되었고, 순례길은 기독교 문화와 정체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세 번째는 중세 유럽의 순례 문화입니다 순례는 종교적 행위인 동시에 문화적, 사회적 행사였습니다 죄의 용서를 구하거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 순례길에 나섰으며, 순례를 통해 다양한 지역 사람들이 교류하기도 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이 과정에서 유럽 각지의 성직자, 상인, 예술가들이 모이는 문화 교류의 장으로 발전했습니다 이 순례길의 다음과 같은 조성과 발전 과정을 거쳤습니다 순례길의 형성: 순례길은 유럽 전역에서 산티아고로 향하는 여러 경로로 발전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경로는 ‘프랑스 길(Camino Francés)’로,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오는 루트를 말합니다 순례자들이 쉬거나 기도할 수 있는 수도원, 병원, 숙소(알베르게)가 순례길 곳곳에 세워지며 길이 체계화되었습니다 순례자와 순례길의 상징은 이렇습니다 순례자들은 조개껍데기(스캘럽 쉘)를 상징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조개껍데기는 갈리시아 해안에서 많이 발견되었으며, 산티아고 순례를 완수했다는 증표가 되었습니다 지팡이와 망토도 순례자들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순례길의 황금기를 거쳐 쇠퇴하게 됩니다 순례길은 11~13세기에 황금기를 맞이했으나, 이후 종교개혁[기독교 대분열 香山], 전염병(흑사병), 정치적 변화로 인해 순례가 쇠퇴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신앙적 이유뿐 아니라 역사와 문화적 체험을 목적으로 하는 현대적 순례길로 재조명되면서 다시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이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사전이나 여행 안내서 등에서 전해주는 그렇고 그런 설명입니다 그러나 쇠퇴했던 이 길이 부활하게 된 배경에는 1970년대에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가 이끄는 스페인 독재 정권과 로마 교왕청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작용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1 프랑코 독재 정권과 산티아고 순례길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프랑코 정권은 나름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프랑코는 1939년부터 1975년까지 스페인을 통치하며 강한 국가주의와 가톨릭 신앙을 결합한 독재 정권을 유지했습니다 그는 스페인의 가톨릭 정체성을 강화하려 했고, 이를 통해 국내 결속을 다지고 국제적인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특히 1970년대 초에는 스페인의 국제적 고립을 극복하기 위해 문화적, 종교적 자산을 활용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이러한 전략의 일부로 부각되었습니다 산티아고와 국가주의의 관계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산티아고는 스페인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레콩키스타 시기 이슬람 세력에 맞선 기독교 수호자로서 "무슬림 학살자 성 야고보"라는 뜻을 가진 Santiago Matamoros의 이미지는 프랑코의 국가적 아이덴티티와 맞아떨어졌습니다 따라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부활시키는 것은 스페인의 전통적 기독교적 유산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2 산티아고 순례길 부활은 로마 교왕청과 프랑코 독재정권의 협력이 산물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지지는 이와 같았습니다 로마 교왕청은 당시 프랑코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프랑코 정권은 가톨릭을 국교로 삼고 교회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협력적이었습니다 교왕청도 산티아고 순례길의 홍보와 부활을 통해 신앙 회복과 순례 전통의 부흥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는 교회가 유럽 내에서 신앙을 다시 강화하려는 전략의 일환이었습니다 순례길의 국제적 홍보에 교왕청과 스페인 정부의 협력이 있었습니다 프랑코 정부와 교왕청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톨릭 세계의 신앙심 회복과 유럽 기독교 문화의 중심지로 재조명하려는 목표를 공유했습니다 1971년에는 국제적인 주목을 끌기 위해 산티아고 순례길을 주요 행사로 포함하는 등 대규모 종교 이벤트가 열렸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70년대 순례길 부흥되면서 이런 구체적 결과를 낳게 됩니다 관광과 종교의 결합: 프랑코 정권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홍보하며 단순한 신앙적 차원을 넘어 관광 자원으로 활용했습니다 이는 경제적, 외교적 목적도 포함한 결정이었습니다 순례길은 프랑코의 유산으로 스페인의 전통과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수단이 되었으며, 이후 현대적 산티아고 순례길의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1975년 프랑코가 죽은 뒤 스페인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정권과 종교의 결탁이 약화되었지만, 순례길은 이미 종교적·문화적 유산으로 자리 잡아 더 많은 사람이 찾는 순례지로 발전했습니다 1987년 유럽 연합(EU)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유럽 문화 유산으로 지정하면서 순례길의 국제적 위상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둘러싼 논란과 비판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적 악용 문제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프랑코 정권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스페인의 가톨릭 정체성과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다는 점을 비판합니다 성 야고보를 이슬람과의 싸움에서 기독교를 수호한 상징으로 사용한 것도 역사적 복잡성을 단순화한 프로파간다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종교와 정치의 결탁 문제입니다 로마 교왕청과 독재 정권 간의 협력은 종교적 신념이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경고로 남아 있습니다 1970년대 산티아고 순례길 부흥은 프랑코 정권과 로마 교왕청의 정치적, 종교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습니다 프랑코 정권은 이를 통해 스페인의 전통과 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했으며, 교청은 신앙과 순례 문화를 부흥시켜 신도들의 결속을 도모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오늘날에도 순례길의 종교적, 정치적 의미를 복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산티아고 길 순례에 다녀오는 것은 참여자의 판단에 따르는 것이니 그 일에 대해 왈가왈부曰可曰否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긍정적 내용만 소개하는 안내 책자 등의 내용만 믿지 말고 이 순례길의 탄생에서부터 역사, 특히 어두운 역사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떠나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런 말씀을 드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