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낭송) 회상, #노벨문학상작가_한강

(시낭송) 회상, #노벨문학상작가_한강

#좋은시 #낭송권숙희 #힐링낭독회 회상 / 한강 아무것도 남지 않은 천지에도 남은 것들은 많았다 그해 늦봄 널브러진 지친 시간들을 밟아 으깨며 어김없이 창은 밝아왔고 흉몽은 습관처럼 생시를 드나들었다 이를 악물어도 등이 시려워 외마디소리처럼 담 걸려올 때 분말 같은 햇살 앞에 그저 눈 감으면 끝인 것을 텃새들은 겨울부터 아니 그전 겨울부터 아니아니 그 전 겨울부터 목 아프게 지저귀고 있었다 때론 비가 오고 때론 개었다 세 끼 식사는 한결같았다 아아 사는 일이 거대한 장례식일 뿐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어린 동생의 브라운관은 언제나처럼 총탄과 수류탄으로 울부짖고 있었고 그 틈에 우뚝 살아남은 영웅들의 미소가 의연했다 그해 늦봄 나무들마다 날리는 것은 꽃가루가 아니었다 부서져 꽂히는 희망의 파편들 오그린 발바닥이 이따금 베어 피 흘러도 봉쇄된 거리 벗겨진 신 한 짝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천지에서 떠밀려온 원치 않은 꿈들이 멍든 등을 질벅거렸고 그 하늘 그 나무 그 햇살들 사이 내 안에 말라붙은 강 바닥은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모든 것이 남은 천지에 남은 것은 없었던 그해 늦봄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