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본철교수-17세기 영적 각성-교회사 특강16-성령론
16세기 초엽의 유럽은 개인 영지(領地)를 배경으로 한 지방분권적 봉건제도가 몰락하면서, 유능한 봉건영주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민족국가의 성장을 가져온 시기였다 여기에서 교회 절대권의 몰락, 신흥(新興) 시민사회의 등장, 민족의식의 강화 등의 급속한 변화가 초래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시민사회와의 갈등과 대립 끝에 혁명이라는 과정을 거쳐, 절대 왕정(王政)의 해체와 더불어 근대 시민사회를 향한 변혁을 낳았다 이러한 과정을 가장 일찍 밟아간 곳이 영국이며, 튜터가(家)의 헨리 7세가 민족을 통일한(1485년)이래 성립된 튜터 왕조와 이를 계승한 스튜어트왕조는 영국 절대 왕정의 화신(化身)이었다 또 그것이 청교도(淸敎徒) 혁명을 통해 명예를 가져온 영국 역사의 가장 중요한 전환적 시기가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청교도’(淸敎徒; Puritans)란 이름의 기원은 1559년부터 시작되어 1567년까지 계속된 예복논쟁(禮服論爭) 기간중에 영국국교회 내의 예배의식에서 카톨릭적인 요소를 제거하려던 개혁자들을 비방하는 주교들의 문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당시 대감독 파커(Parker)의 문헌들 속에는 까다로운 사람, 청교도 등의 별명으로 개혁 집단을 경멸하고 조롱하기 위해 사용한 기록을 볼 수 있었다 실제적 개혁 운동은 청교도주의의 시조로 불리우는 존 후퍼(John Hooper)에 의해 일어났는데, 그는 헨리 8세때 대륙으로 건너가 개혁사상을 배워 확실한 개혁주의적 신학체계를 갖게 되었다 그는 귀국하여 교회에 재판권을 두는 일, 불경(不敬)한 미사, 성직자의 독신생활, 성자(聖者)에 대한 기도, 비밀고해(秘密告懈), 금욕주의, 연옥사상 등에 반대했고, 예복입는 것을 역시 거절했다 또 세례에서의 십자가의 시용이나 결혼식에서의 반지의 사용 같은 관습도 폐지하도록 요구했다 이처럼 청교도운동(Puritanism)은 영국국교회의 모든 비성서적인 신앙과 생활을 정화시키려는 목적에서 일어난 개혁운동이다 그러나 원래 그들이 교회를 분리시키려는 동기를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대한 복종이었다 이같은 그들의 정신을 기준으로 해서 볼 때, 엘리자베스 여왕의 절충적 교리 형성, 즉 카톨릭적이면서도 개신교적인 혼합은 절대 묵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