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기획 ⑲-대한독립을 외친 구세군 부부

3.1운동 100주년 기획 ⑲-대한독립을 외친 구세군 부부

CTS뉴스는 3 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3 1운동의 역사를 간직한 교회와 지역, 단체들을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경기도 파주지역입니다 파주 교하리 주민들을 주도하며 파주만세운동의 시작점이 됐던 구세군 부부를 소개합니다 구효완 기잡니다 공릉장날 3월 28일을 택하여 독립의거에 들어선 것이나 왜경의 흉탄으로 많은 사상자를 낸 것 어찌 잊으랴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 파주 봉일천 시가지 입구에 세워진 파주 3 1운동 기념비에는 당시의 상황과 함께 선열들의 의거를 추모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1919년 3월 10일 일본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은 파주지역에도 번졌습니다 파주 교하리 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10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촉발한 가운데 선두로 나선 사람은 구세군인 임명애 부교 이때를 기점으로 남편인 염규호 정교는 만세운동의 확산을 결심하며 ‘3월 28일 모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는 내용의 격문을 배부했습니다 격문을 받은 주민들은 감격하여 25일부터 장터에 모였으며 모인 군중은 약 700여명 염규호, 임명애 부부는 선두에서 지휘하며 면사무소를 접수하고 주재소로 행진하던 중 일제순경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사망자가 나오게 되고, 이에 시위대는 흩어지며 염규호, 임명애 부부는 보안법과 출판물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 만세운동의 영향으로 인근지역에 확산됨에 따라 27일에는 청석면, 광탄면에서 각각 수백명의 군중들이 만세운동에 나섰고, 28일 장날에 모인 파주 전역의 군중들까지 합세하여 수천여 명의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나게됩니다 INT 황선엽 사관 /구세군역사박물관장 1919년 9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임명애 부교는 당시 만삭의 몸이어서 10월 출산을 위해 풀려났다가11월 아기와 함께 다시 들어와 수감생활을 하게 됩니다 당시 수감되있던 여옥사 8번방엔 유관순 열사도 함께 있었습니다 아기를 키우기에 열악한 상황에 유관순 열사는 산모에게 밥을 나눠주고 기저귀를 말려주는 등 임명애 부교를 많이 도왔습니다 이후 복역을 마친 염규호 정교와 임명애 부교는 고향으로 돌아간 뒤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후손들은 198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며 나라를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 부부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INT 황선엽 사관 /구세군역사박물관장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몸을 바쳐 헌신한 구세군 독립운동가 염규호 정교와 임명애 부교 그 정신과 발걸음이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녹아질 수 있게 되길 소망합니다 CTS뉴스 구효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