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24.07.14 좋은 무화과(예레미야 24:1-3)

오후24.07.14 좋은 무화과(예레미야 24:1-3)

무화과 나무 2024년 7월 1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4:1-3 (24:1)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방백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로 내게 보이셨는데 (24:2)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더라 (24: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악한 것은 극히 악하여 먹을 수 없게 악하니라 사람이란 한 번 터잡은 곳에서는 좀처럼 떠나지 않을려고 합니다 그만큼 정들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과거와 정들었습니다 과거에서 깔린 선로 위에서 지금의 자기를 구성합니다 따라서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자신의 뿌리가 뽑히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 관점으로 단단히 기초를 다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화과 나무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에 견줍니다 여기서 인간들의 오해는 번집니다 약속의 땅에는 하나님의 복된 약속을 증명이라고 한 듯이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가 만발합니다 이처럼 이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이나 유대민족이 줄곧 번창하기를 그들은 고대했습니다 자기네들 말고 약속의 무화과 나무 같은 존재는 따로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왜곡된 견해를 그냥 지켜 보지 않고 선지자를 보내어 질책하십니다 즉 “너희들은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무화과 나무로 연결시켜 설명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무화과 나무는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둘로 나뉘어진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그냥 무화과 나무 통으로 이스라엘이고 유대민족이기를 원합니다 ‘좋다, 나쁘다’를 개입했을 경우, 그 기준은 본인들이 제시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안목과 관점으로 주입시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근원적으로 계시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보임을 말해줍니다 ‘잘못된 견해’란 자기를 좋게 보는 견해를 말합니다 자신이 자신을 나쁘게 볼 근거를 젼혀 지니고 있지 않음을 나타내 보이는 겁니다 자기의 문제점을 모르게 되면 자신은 마땅히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오인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허점을 바로 지적해 주시는 것이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왜 인간들을 매사에 하나님에 대드는 것으로 살아가는 걸까요? 요한복음 13: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가룟 유다는 자신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자신에 의해서 실시된다고 여깁니다 가룟 유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을 악마가 일방적으로 통제한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이것은 가룟 유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합니다 생각이나 의지나 행동을 인간 본인의 결심에 의해서 생성해 낸다고 여깁니다 그래야지만 자기 행위에 대해서 윤리적 책임성이 주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행동해놓고서 “내가 안 했고 악마가 했다”가 우기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악마가 인간의 생각을 조종하면서 어떤 결과를 노리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팔 생각’입니다 즉 예수님을 피해서 살고 상관없이 살도록 부추깁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백성을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로 나누시는 이유가 나타납니다 자연은 언약에 추종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악마에 추종합니다 무화과 나무는 자연물이다 식물입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기르시는대로 자라서 열매 맺히게 하신다면 그냥 열매 맺혀서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드립니다 바로 이러한 취지가 약속의 땅에서 자라나는 식물이나 동물들에게 적용됩니다 그런데 인간들만큼은 기어이 하나님에게 대듭니다 반항하고 반발합니다 이는 자기만의 삶을 따로 추구합니다 그 누구의 지시나 명령을 거부하면서 말입니다 예를 들면, 높은 절벽 끝에서 휴대폰으로 인증 사진을 남기려는 자가 욕심이 내어 절벽 끝지점에서 미끌어져 떨어져 죽었을 때에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 사람은 죽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자연 관점으로 말해서는 ‘중력이 살아 있다’가 됩니다 중력 가속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G= 입니다 인간은 죽더라도 자연은 살아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반복해서 죽어나가더라도 언약 법칙은 한결 같습니다 출애굽의 원칙입니다 포로 잡혀 있는 상태에서 자력으로 구출이 못되는 자들을 주님의 자기 희생으로 그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 들어서게 했습니다 바로 이 취지가 지속적으로 지켜지고 유지되는 땅이 바로 ‘약속의 땅’입니다 아가서 2:3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무화과 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즉 무화과 나무가 하나님의 솜씨에 의해서 번창하는 것처럼 그런 낙원에 사는 인간들도 이 무화과 나무와 같은 자세로 임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제국에 잡혀 가서 다시 모든 자율권과 주도권을 상실한 바로 그들이 ‘좋은 무화과 나무’라는 겁니다 반면에 이 약속의 땅을 마치 자기 소유의 땅인 양 우기면서 붙들고 결코 떠나지 않으려는 자들이 바로 ‘악한 무화과 나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원칙은 처음 출애굽 당시의 첫 사랑을 원하시는 겁니다 그 때는 결코 자기 의사나 노고가 끼어들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주도권이 없었습니다 신약에 들어와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눅 16:20-21) 이 본문에 보면, 이 거지 나사로는 개보다도 못한 취급을 이 세상에서 받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거짓 나사로가 낙원으로 들어가는 구원받은 자입니다 그는 자기 몸도 가눌 길 없습니다 스스로 내세울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내놓은 열매는 결코 자신의 애씀과 노고가 아닙니다 그는 그냥 그 나라와 의를 구할 뿐입니다 이게 바로 사랑이라는 겁니다 사랑이란 사랑하시는 분과 시선을 마주하는 겁니다 시선을 연결하는 겁니다 이 시선 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예수님과 같이 해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게 하십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우리가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