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7월 24일 그분의교회 주일설교. "우리에게도 소명이 있는가?" (디모데후서 1:9; 2:20.
하나님께서는 그런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소명을 주셨는가? 우리 신자들은 소명으로 부르지 않으셨는가? 우리가 다 신학교에 가지 않아도 우리에게도 소명이 있다 할 수 있는가? 우리가 다 목사, 선교사로 부름을 받지 않았는데도 과연 우리에게도 소명이 존재하는가? 우리가 저 아프리카에 그리고 저 아시아의 고통 받는 난민들에게 최소한 단기 선교사라도 보냄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가 그렇게 떠나지 않아도 우리가 소명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목사와 선교사와 특별한 헌신자로 살지 않아도 우리도 소명을 받은 사람으로 살 수 있는가? 우리는 지극히 평범한 신자들인데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우리 신자들을 향해 평신도라고까지 부르기도 하는데, 제가 아주 강력히 반대하는 표현입니다만, 그런 우리 평신도들에게도 소명은 존재하는가? 이런 문제들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런 면에서 이번 설교의 주제는 우리의 신앙과 매우 현실적으로 연관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도 소명이 존재한다면 그 소명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이런 부분들에 대해 오늘 디모데후서 1장 9절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에도 정말 소명이 존재한다면 그 소명은 어떤 소명인가?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이 땅에서 구현해 나가야 하는가? 이런 부분들에 대해 다음 주일에 디모데후서 2장 20절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들은 크게 그가 목회를 목적으로 기록한 목회서신과 그리고 그가 감옥에 있을 때 기록한 옥중서신과 그리고 그 이외의 편지들로 구분이 됩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기록한 옥중서신으로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목회를 목적으로 기록한 서신으로는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그리고 디도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외의 편지들로는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로마서 등과 같은 서신들이 있습니다. 바울의 서신들을 기록 목적에 따라 구분하면 대략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이런 구분에 따라 나누어 볼 때 바울이 쓴 디모데후서는 디모데전서와 그리고 디도서와 더불어 목회서신에 속합니다. 이 서신들을 목회서신으로 처음 구분한 사람은 독일의 신학자 파울 안톤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이 서신들을 목회서신으로 구분하였는데 그 이후로 교회는 자연스럽게 현재까지 파울 안톤의 구분을 따라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목회서신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편지들을 목회서신으로 구분하는 이유는 바울이 이 편지들을 통해 당시 디모데와 그리고 디도가 목회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목회적인 도움을 줄 목적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살펴 볼 때 바울의 목회서신들은 엄밀히 따지면 디모데와 디도라는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다른 서신들이 다수의 수신자들을 대상으로하는 편지라면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디모데와 디도라는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목회서신의 특징입니다. 당시 디모데는 디도와 더불어 실제 목회 현장에서 목회를 담당했던 교회 지도자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와 디도에게 그들이 목회자로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교회를 잘 목회하고 이끌어 갈 수 있는지 도움을 주기 위해서 이 편지들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목회적 도움을 주기 위해 기록된 편지들이기 때문에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에는 디모데와 디도가 목회를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중요한 내용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들 안에는 디모데와 디도가 목회자로서 지녀야 할 품성과 신앙적 자세, 그리고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재판이나 징계와 관련된 부분들, 그리고 교회 안에서 배척하고 조심해야 할 부분들 예를 들면 거짓 선생들과 돈을 사랑하는 것들, 그리고 특별히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들 예를 들면 고아와 과부를 돕는 일, 그리고 심지어 그들이 목회자로서 건강을 돌보아야 하는 일 등 디모데와 디도가 목회를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많은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들은 모두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가 목회를 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기록한 내용들인 것입니다. 디모데전후서를 잘 읽어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목회에 필요한 많은 도움을 주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디모데에 대한 바울의 각별한 사랑과 지극한 관심이 편지를 통해 느껴집니다. 이 가운데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구절들은 바울이 특별히 디모데 개인을 위해 그에게 주는 조언에 해당합니다. 이 조언은 특별히 “소명”과 연관된 조언입니다. 이 조언은 특별히 디모데가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목회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본질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가치를 목회를 통해 잘 구현해 나가기 위해서는 디모데가 자신의 목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는지에 관한 조언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 조언은 특별히 소명에 관한 조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제가 어쩔 수 없이 두 부분의 구절들을 따로 따로 선정해서 선택했습니다. 논리적인 관계를 생각하면 디모데후서 1장과 2장 전체를 본문으로 정해야하는데 그렇게 하면 이 부분을 전부 한꺼번에 설교할 수도 없고 그리고 시간도 많이 지연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특별히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목회적 조언 가운데 소명과 연관된 구절들을 선택해서 이 부분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 9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구절에 대해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란 누구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저와 여러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물론 궁극적으로는 그런 의미가 되겠지만 그것은 나중 문제이고 여기서 먼저 우리가 가리키는 사람들은 “바울과 디모데”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과 디모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울은 직분적으로 사도라는 매우 특별하고도 유일한 직분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디모데를 같은 위치 선상에 놓고 디모데와 자신을 우리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비록 디모데가 사도의 직분을 받지는 않았지만 디모데도 바울과 함께 우리에 포함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디모데가 사도도 아니고 그리고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지도 않았는데 디모데를 자신과 동일한 울타리 안에 포함시켜 “우리” 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과연 무엇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를 “우리” 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우리가 보통 어떤 대상을 ‘우리’라고 부를 때에는, 분명 자신과 그 대상 속에 어떤 공통된 동질성이 있을 때 그렇게 부릅니다. 동질성, 동질감이 우리라는 칭호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비록 사도나 목회자로 각각 다르게 부름을 받았고 그리고 외형적 직분은 서로 다르지만 그들이 모두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비록 바울은 사도이고 디모데는 한 교회의 목회자이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 소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직분은 서로 달라도 그들은 소명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이 소명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9절의 바울의 말을 대화체로 풀어 말씀드리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야, 너는 목회자이다. 그러나 너는 목회자이기 이전에 소명자로 부름을 받았다. 나는 사도이다. 나도 사도이기 이전에 소명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니 너와 내가 맡은 직분은 서로 달라도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의 말이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를 우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디모데를 소명자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디모데를 우리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셨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 속에는 이런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또한 디모데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를 목회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바울을 사도로 세우시고 디모데를 목회자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각각 사도와 목회자라는 소명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과 디모데에게 이렇게 각각의 소명을 주시어 부르셨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울과 디모데를 구원하신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디모데를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디모데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원하셨듯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바울과 디모데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두 개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하나의 십자가입니다. 여기에 매우 중요하고도 분명한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울과 디모데를 구원하신 그 구원과 우리의 구원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신자들 즉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께로부터 분명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을 받고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사도라는 직분을 통해 소명을 주시고 디모데에게 목회자라는 직분을 통해 소명을 주셨듯이 비록 내가 교회 안에서 그 어떤 직분이나 그 어떤 위치에 있지 않다 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이 땅에서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구원하신 목적은 당신에게 소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받은 소명은 거룩한 소명, 특별한 소명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이 존재하는 한, 우리에게는 반드시 각자의 소명이 존재합니다. 소명이 없는 구원은 이 땅에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얻었다면 반드시 소명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