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여객기 사고 최대 사건으로 기록된 대한항공 KAL 007편 격추 사건
미국 뉴욕에서 출발해 한국의 서울 김포공항으로 도착 예정이었던 승객 246명, 승무원 23명이 탑승한 대한민국 국적기 대한항공 KAL 007편 항공 여객기가 1983년 9월 1일 사할린 근처를 지나가는 중 당시 소련 공군기의 요격으로 격추 당해 승객과 승무원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냉전이 종식되기 전이었던 당시 소련은 민항기로 위장한 미군 항공기가 자신들 영공에서 활동중이라는 첩보를 받고 있었는데 당시 대한항공을 격추한 소련 조종사는 민항기 표시를 보고 민항기라는 사실은 인지했지만 미군이 위장한 군용기라고 생각해 고민도 없이 격추 했다고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 있다 대한항공에 대한 소련 공군기의 경고사격이 먼저 있었기는 하지만 야간이어서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보지 못한 것인데 봤음에도 경고 사격을 무시했다고 단정한 소련 조종사는 그대로 미사일 버튼을 누른다 당시 대한항공 기장이었던 천병인은 공군 출신으로 현재 블랙이글스로 알려진 곡예비행단 출신 베테랑 조종사였다 대한민국 공군 블랙이글스 홈페이지의 역대 팀원 자료에서도 그의 사진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영상의 썸네일로 제공된 하얀색 바탕의 대한항공 여객기는 실제 이 사건에서 격추 당한 007편의 실제 모습이며 특색이 없던 흰색 바탕의 도색을 사용했던 대한항공은 이후 우리가 알고 있는 파란색 계열의 대한항공 색을 갖추면서 색상 만으로도 대한항공 비행기라는 걸 조금 더 뚜렷하게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외교적인 힘이 부족했던 우리나라는 이 사건 이후 여러 매체를 통해 항의성 담긴 메세지를 표출 했는데 아기공룡 둘리에서도 이 사건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다루었었다 둘리 만화를 좋아한 사람에게는 기억날 만한 이야기로 우리 비행기를 격추한 소련 조종사를 잡겠다고 둘리가 나섰다가 간첩을 잡는다는 마무리 되는 이야기가 바로 이 사건이며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도 이 사건과 관련된 대목이 등장한다 대한항공 007편은 태평양을 통해 일본 위를 지나 서울로 가게 되어 있는데 예정된 노선이 아닌 소련 사할린을 지나 서울로 간 이유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원래 소련을 지나는 노선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련에서도 대한항공을 인지하지 못한 케이스 최대 인명 피해가 난 항공사고로 (현재까지 한국의 항공사고에서도 최대 인명 사고 1위가 이 007편 격추 항공기다) 안타까운 사연이 많을 수 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민항기를 격추한 조종사는 아직까지도 이 대한항공이 스파이 임무를 위해 들어온 비행기라고 확신하며 주장하고 있다 물론 만약이라는 단서를 달고 이게 스파이가 아닌 실제 민항기가 맞다면 유가족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한발 물러서는 자세를 취했지만 자기 합리화를 위한 행동일 뿐, 죄책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사건 후 일본 방송이 소련 조종사를 만나 방송 인터뷰를 했는데 민항기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만한 내용이었음에도 소련의 주장을 뒤엎지는 못했다 일본과의 방송에서는 민항기라는 걸 알았다는 식으로 인터뷰를 했지만 이후 한국과의 매체 인터뷰에서는 다시 번복하며 민항기인 줄 몰랐고 위장한 미군기라고 알았다며 말을 바꿨다 일본 방송 당시 동아일보는 도쿄 특파원의 보도 기사로 방송 내용을 전달했는데 도쿄 특파원으로 이 기사를 썼던 인물은 이낙연, 현재 대한민국 문재인 정부의 첫 총리다 1991년 3월 24일자 동아일보의 이낙연 당시 기자가 쓴 내용에 따르면 소련 사할린과 가까운 일본 쪽에서 수색작업을 했었는데 그 과정에서 발과 손이 발견되었지만 수습 과정과 이후 보관 존재 유무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이 사건에 대한 규탄 결의안을 상정 했는데 미국과 일본을 포함한 9개국은 찬성, 당자국인 소련과 공산진영인 폴란드는 반대, 중국 등은 기권을 했다, 결과적으로 규탄 결의안은 부결되어 채택되지 않았다 이 내용은 2017년 1월 일본의 비밀 외교문서가 공개되면서 알려졌다 해당 대한항공 여객기에는 미국 하원의원이 탑승 중이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소련을 압박했고 당시 대통령이던 레이건은 정치적으로 이 사건을 활용하면서 상당 부분 이득을 봤다, 당시 국제적인 힘이 없던 우리나라는 소련에 대해 정식으로 항의하지 못하고 미국을 통해 우회적으로 간접 항의를 했는데 그나마 미국 현역의원이 함께 사망했기 때문에 어느정도 영향을 줬지 결과적으로 사건 자체가 원인 불규명, 사건 관계자 미처벌, 소련에 의한 미보상 등으로 거의 명확하게 처리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많이 이용당한 사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