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과 백련사 정약용 치유길 | #감성여행 #여행에세이 #강진가볼만한곳 #koreatravelvlog #다산초당 #백련사 #koreatraveling #치유여행 #힐링여행
강진, 다산의 흔적을 거닐며 다산의 이야기를 듣는다 영암의 월출산(810m)과 해남의 두륜산(700m) 그리고 장흥의 천관산(724m)의 정상을 선으로 연결하면 강진군이다 정확히 일치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쯤 이야기하면 강진의 위치를 비교적 정확히 설명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방향에서든지 세 개의 봉우리 중 하나만 찾으면 강진을 찾을 수 있다 강진을 말할 때 다산 정약용을 뺀다면 회초리 없는 서당쯤 되지 않을까? 정약용의 18년간의 귀양살이 스토리를 듣기 위해 ‘남도 답사 1번지’라 일컫는 강진을 걷는다 강진은 서울에서 먼 거리에 있고 제주도를 가기 위해 배를 타는 곳인 까닭에 조선시대의 단골 귀양지였다 1801년 정약용의 반대 세력이 일으킨 신유옥사에 걸려들어 정약용은 강진으로 귀양을 떠난다 신유옥사는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극형으로 처벌한 사건인데 이 사건으로 둘째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떠나고 다산은 이곳 강진에 유배되었다 동문 밖 주막집에서 4년, 고성사 보은산방에서 1년, 제자 이학래의 집에서 2년, 마지막으로 다산초당에서 11년을 지냈다 첫 번째 거처 주막집은 할머니의 배려로 4년 동안 기거할 수 있었던 곳이었는데 그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할머니에게 감사의 뜻으로 사의재(四宜齋)라는 당호를 지어주었다 사의재란 ‘마땅히 지켜야 할 네 가지’라는 뜻으로 올바른 생각, 용모, 말씨, 행동을 가리킨다 동문샘 근처에 주막집과 사의재가 복원되어 있고 그 주변은 찻집과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다 동문샘에는 마을 주민이 죽거나 아이가 태어났을 때 반드시 물이 하늘색으로 변했다가 다시 맑은 물로 변했다는 설화가 얽혀 있다 이 영험한 이야기가 이곳에 남아있어 기억되고 복원될 수 있는 또 하나의 구실을 했을 것이다 고요 속에서 정약용의 유배 생활을 최대한 느끼기 위해서 동이 트이자마자 다산초당 길목에 들어섰다 다산초당에 가려면 귤동마을을 지나야 한다 허름한 만덕슈퍼 입간판이 있는 곳부터 귤동마을이다 (가게 건물 위의 간판은 떨어져 나갔고 건물도 낡아 보이지만 사람들이 드나드는 마을 입구에 있어 앞으로도 오랫동안 문을 닫지는 않을 것 같은 생각에 가게의 이름을 적었다 ) 배수로가 없는 경사진 도로를 따라 마을길에 오른다 비가 와서 물이 도로 위로 천천히 흘러내려 시골길을 걷는 어릴 적 향기를 불러일으키는 정겨움이 더해진다 다산초당에 오르는 산이 시작되는 길부터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길처럼 보인다 커다란 삼나무의 뿌리가 그물처럼 땅바닥에 드러나 있어 산책길로 만만하게 생각하고 잠시 주변 경치에 한눈이라도 팔고 걷다가는 나무뿌리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오솔길의 운치를 더하고,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에 신발을 적시지 않고 산길을 오를 수 있게 해준다 초당으로 가는 전체의 길은 울창한 숲 자체에서 발산하는 서늘함이 밀려든다 거목의 삼나무에 이끼가 2m 이상 두를 때도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 고즈넉한 숲길 곳곳에 고목을 베고 남은 그루터기들이 산재해 있다 땅 위로 드러난 나무뿌리들을 없애기 위함일까? 정말 그럴까? 쉰 걸음쯤 걸으면 오른편에 평평하게 꽤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묘소가 있다 낮은 언덕 위로 눈을 익살스럽게 치켜뜬 동자상 둘이 묘의 좌우에서 서로 마주하고 서 있다 정약용의 외가 친척이자 제자인 윤종진 부부의 합장묘다 사실 다산초당은 정약용의 어머니 해남윤씨 문중 윤단(尹慱)의 서고와 정자가 있던 곳이다 윤단은 윤종진의 조부이며, 윤단과 그의 아들 윤규로는 정약용을 다산의 산정으로 인도한 사람이다 그 윤규로의 아들이 묘지에 안장된 윤종진이다 정약용은 유배를 끝낸 후 한양으로 온 윤종진에게 ‘순암’이라는 호를 지어주는데, 이때 호를 지어주면서 쓴 문서에 다산사경이라는 네 수의 시가 따라 적혀있다 아마도 호를 지어주면서 고향에 내려가면 다산사경을 잘 보존해 주라는 부탁의 의미로 썼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약용은 이곳을 네 번째 거처로 삼고 우물과 연못을 만들며 초당 주변을 손수 가꾸었다 정석(丁石)이라는 각자, 땅이 축축하여 파보니 석간수가 흘러나와 조성한 약천(藥泉), 연못에 돌로 만든 석가산(石假山), 그리고 초당 앞에 있는 솔방울로 불을 지펴 차를 달였던 평평한 바위인 다조(茶竈)가 바로 다산사경이다 다산사경은 후대에 부쳐진 이름이 아니라 정약용이 자부하며 만든 네 가지 보물인것이다 이 네 가지 보물은 모두 다산초당의 몇 발짝쯤 떨어진 주변에서 모두 찾을 수 있다 다산이라는 호 또한 이곳의 지명이다 야생 차나무가 자라는 산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녹차의 본고장은 이곳 강진이다 초의선사는 정약용을 스승으로 섬기며 그에게 유학과 실학을 배운 승려다 두 사람은 다도에 대해 정립한 최초의 인물인데 다산은 경세유표에 실려있는 “각다고(傕茶考)”편을 짓고 초의는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하며 우리나라의 다도를 정립한다 각다고는 국가의 차에 대한 전매정책을 통하여 무역을 제안한 내용이고, 동다송은 우리나라 차에 대한 애찬과 제조법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정약용의 호는 여유당과 사암을 비롯하여 20개가 넘는데 다산은 다산초당에 머물렀을 때만 이 호를 사용했다 정약용은 호 대부분을 거처와 관련된 지명을 사용하거나 본인의 학문적 상황에 따라 달리 사용했기에 그 수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지금껏 다산으로 불리우고 가장 오래 사용되는 호라는 점은 강진과의 끈끈한 인연을 느끼게 해준다 또한 다른 호와는 달리 그의 고달픈 긴 세월이 물들어 있는 것 같아 더욱 애틋하다 소박한 기와지붕을 얹은 초당 앞마당에 들어섰다 아무도 없다 이 경내에 나 혼자 머물고 있다 어제부터 보슬비까지 내리고 있어 인적까지 씻겨나간듯하다 쓸쓸함의 극치다 초당이란 한자대로 작은 초가집을 말한다 하지만 1958년 복원된 다산초당의 복원된 모습은 기와집이다 유적지를 복원한 곳을 가보면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복원한 곳이 대부분이다 초가집은 해마다 지붕을 다시 만들어야 하고, 관리가 자주 필요한 이유로 기와지붕으로 복원하는 경우가 많다 실감의 정취는 덜 하겠지만 그 수고스러움을 따지지 않을 수 없으니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본래의 모습인 다산초당의 옛날 초가집 모습이 궁금했는데 다행히도 초의선사가 그린 그림을 찾아볼 수 있었다 초의선사는 추사 김정희와 정약용을 자주 찾아가 다도를 즐기고 정약용과 함께 차를 발전시킨 인물이다 김정희가 유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서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나에게 차를 중독시켰으니 차를 보내주지 않으면 내려가서 차밭을 모두 밟아 망쳐 버리겠다’고 쓴 능청스러운 대목도 있다 이곳에는 눈여겨 볼만한 세 개의 현판이 있다 “다산초당(茶山草堂)”의 글자는 추사 김정희의 글자인데 네 글자의 배치와 조합이 뛰어노는 아이들같다 이 현판은 김정희의 글자 중 네 글자를 찾아서 모아 놓았기 때문이다 초당 동쪽 건물 동암에 걸려있는 다산동암(茶山東庵)이라는 현판은 정약용의 글씨이고 보정산방(寶丁山房)은 김정희가 쓴 글씨이다 초당을 지나 백련사로 가는 길에는 구강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구강포(九江浦)는 강진만으로 아홉 개의 강물이 모인다는 데서 붙여진 강진만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정약용은 이곳에 앉을 곳을 만들고 조수를 굽어보며 사람들을 그리워했다는 편지글이 있다 또한 흑산도로 유배 간 형에 대한 걱정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강진군에서는 정약용이 외로움과 그리움을 달랬던 그곳에 천일각이라는 아담한 정자를 만들었다 그곳에 올라서니 길을 따라 흐르는 산바람과 강진만에서 올라오는 아침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온다 다른 사람의 인기척이 산 아래서 그들보다 먼저 길을 타고 오른다 인적없는 유배지를 떠나기가 아쉬워 연못 안 석가산에 기도를 올리고 마당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다조(茶竈)를 한참을 매만진다 보슬비를 맞으며, 비와 함께 다시 동자석이 지키고 있는 윤종진 부부의 앞을 지나 귤동마을로 거슬러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