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마을구경] 단촌면 후평리, 점곡면 송내리
의성군 단촌면 후평리, 점곡면 송내리 ○ 후평(後坪)리 조선초기(朝鮮初期) 전주 이씨(全州李氏)가 정착 개척하였다 함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구산면(龜山面)에서 단촌면(丹村面)으로 통합 후평동이라 하였음 군조례 제1225호)1988. 5. 1)호에 의거 후평리로 칭함 후평(뒷들)은 고려말 전주 이씨가 정착 개척한 마을로서 구산면에 속하며 후편에 위치한 들판이라 하여 뒷들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전주 이씨가 대대로 가난한 농부로 외롭게 지내오다 지금부터 200여년 전 어떻게 부지런 하였던지 천석을 하는 부자가 되었다 하며 그 이후에 계속 번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음 지금부터 약 200여년 전 후평(後坪)동에 이씨 부부가 살았는데 어찌나 부지런 하던지 화전지에 나가 매일 김매기를 하는데 어느날 새벽 동이 틀 무렵 낯선 어떤 남자가 고분군에 있는 한 고려장에서 몸을 감추는 것을 보았는데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므로 함부로 접근치 못하고 동태를 살피는데 한번은 사람이 나타나지 아니하여 고려장에 잠입 조사를 해본 즉 당시통용화폐인 엽전이 고려장 안에 가득하여 몰래 가지고 와서 논과 밭을 사게 되어 천금 부자가 되었다 하며 지금도 민속 자료로 지정된 99칸집을 건축하여 9대 진사에 9대 천석을 하였다 그로 인하여 이진사의 소작인, 노비 등 가구가 입택하여 마을이 번창하게 되었다고 한다 후평(後坪) 김동주(金東周) 가실(家室) : 서기 1686에 건립한 단층 목조 와가로 주요 건물은 구자형 이며 사랑채 중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랑과 부속건물로 이루어 졌으며 이 집을 처음 지은 이수봉(李秀奉) 이후 9대를 천석이나 수확했으나 한말에 쇠간하여 몰락하여 1932년 김동주(金東周)씨가 매수하여 중요 민속자료 25호로 지정되어 오다가 1988.11월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여 본체가 소실되므로 민속 자료 지정이 해제 되었음 고분군 : 기부 직경이 약7m-18m의 고분군으로서 약 100여기가 있는데 반수 가량은 완전하며 확실한 연대 미상이나 옛사람들의 고려장 이라고도함 ○ 송내(松內) 1리 1620년경 삼척(三陟) 임(林)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장각(獐角)골 이라 하였으며 그 후 1644년 조계승(曹溪昇) 선비가 마을 앞에 큰 솔숲이 있다 하여 송내(松內)라고 개칭하였다 함 장각(獐角)골 : 약 1620년경 성명 미상의 임(林)씨 선비가 마을을 개척당시 시장을 보였다고 하여 장각(獐角)골이라 칭해오다가 그 후 1644년 조계승(曹溪昇) 선비가 이거 동구(洞口)앞에 큰 솔숲이 있었다 하여 송내(松內)라고 개칭하였다 달봉재 : 해발 300m지점에 고래로부터 정월대보름 달마중하는 곳이라 해서 달봉재라고 전함 퇴곡약물탕 : 퇴곡물 이란 곳에 항상 같은 양의 찬물이 흘러내리며 먹으면 피부병에 특효라고 함 ○ 송내(松內) 2리 1550년 미명의 조(趙)씨가 마을을 개척하여 교동(橋洞)이라 하였으며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사촌(沙村)으로 칭하였다 교동(橋洞) : 약1545년 경 미명의 조(趙)씨가 마을을 개척 당시 마을 앞 산골에 서당이 있었는데 학생들의 내왕에 불편을 가져와서 천에 교량을 만들고 통행 하였다 하여 교동(橋洞)이라 칭하였다 의열각(義烈閣) : 선조(宣祖)25년(서기1598년) 임란시 왜군과 접전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수백척 단애에서 뛰어 내려 순국한 김치중(金致中) (송은 김광수의 외손)의 아내와 노비도 함께 죽었다 하여 광해군 1620년 비를 세워 후손들이 제(祭)를 올리고 있다 서당골 : 사촌에 있던 서당이 이곳에 있었다가 중리(中里)로 옮겼다고 전함(지명유래) #단촌면_후평리 #점곡면_송내리 #시골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