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재반격과 피의 고지전'│Korean War (1951.1.14~1953.7.27)
1951년 1 4 후퇴 이후의 반격 작전으로 시작해 서울 · 경기도 · 강원도 일대를 수복하고 지금의 휴전선이 그어지기까지 전선 변화를 지도로 보여줍니다 [해설]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해 유엔군은 한국통일을 눈앞에 두고 총체적으로 후퇴를 감행했다 1951년 1월 4일, 결국 서울은 또다시 공산세력의 손에 넘어갔다 중공군이 막강한 인해전술과 포위 공격으로 빠르게 남하해오자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은 중공군이 금강방어선과 소백산맥을 돌파할 시에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할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평택-삼척을 잇는 방어선에서 더 이상 남하해오지 못했다 너무 빠른 속도로 남진하다보니 보급선이 길어져 한계에 다다른 것이였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유엔군은 중공군의 허점을 파악하고, ‘인해전술(人海戰術)’에 ‘화해전술(火海戰術)’로 맞대응하면서 점차 자신감을 얻어갔다 이후 6 25전란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미 제8군 사령관 매튜 리지웨이의 지휘하에 한강 이남 지역을 탈환하는 이른바 ‘선더볼트’ 작전을 감행하여 관악산을 점령하고 서울 수복의 기반을 확보하였다 동부전선에서는 단양 - 영월 부근에 생긴 전선의 빈틈을 타 인민군이 침투하여 안동 부근에 유격진지를 구축하였지만, 이는 곧 한국군에게 격퇴되었고, 더 나아가 원주를 탈환하여 서부전선에서 선더볼트 작전을 수월히 감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과감하고 탁월한 전술로 유엔군은 두 번째 서울 탈환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1951년 3월,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한 뒤 계속해서 북진, 더 나아가 38선을 돌파하여 철원, 화천, 간성 부근 까지 도달했다 이에 중공군은 4월 춘계공세를 펼침으로써 이를 저지하고 다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목표로 향해 남하하기 시작했다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서울을 선물로 바치겠다며 결사적이고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해 유엔군의 방어선의 틈을 파고 드는데 성공했다 결국 다시 유엔군은 김포-서울-양평-홍천-양양을 잇는 무명선(LINE NONAME)으로 철수해야했고, 중공군은 서울 북방의 우이동 근교까지 빠르게 남하하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중공군의 진격은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에 가로막혔고, 더 이상 서울의 주인이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중공군은 서부에서의 공세가 결과적으로 실패하자, 5월에는 동부전선으로 눈을 돌려 공세를 감행하였다 인제에서 국군을 대파하고 대관령 부근까지 남하하는 등 동부전선이 붕괴되는 위기가 발생하였으나 이루었으나 얼마 후 전선 재정비를 마친 국군과 유엔군의 재반격이 이루어지며 공산군은 다시 38선 이북으로 패주하였다 이 두 번의 대공세가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공산군은 서울 점령과 적화통일을 포기하게 되고, 결국 중공군은 38선 이북 지역이라도 사수하자는 신념으로 공격보다는 방어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서로 각자의 지역을 사수하는 방어전에 돌입했고 대대적인 공세작전은 일어나지 않았 으며, 전선의 미동이 줄고 전선은 고착화되어갔다 전쟁은 승자없는 싸움이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UN 소련대사 야코프 말리크의 중재로 7월 개성에서 첫 휴전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1년 간 지속된 전쟁은 마무리 되는 듯 하였다 그러나 양측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휴전 회담 장소인 개성과 멀리 떨어진 동부 산간 지역에서는 여전히 유리한 협상 자리를 꾀하기 위한 피의 고지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2년간의 치열한 고지전 끝에 결국 공산군과 유엔군은 지금 현재 전선에서 휴전하기로 합의하였고, 1953년 7월 27일 개성 판문점에서 유엔군(총사령관 마크 클라크)과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 펑더화이)간의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끝까지 북진통일을 내세우며 휴전협정을 결사 반대, 참여를 거부하였다 협정일 한 달 전인 1953년 6~7월에는 끝까지 휴전협정에 유리한 자리를 얻기 위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가장 대표적인 전투가 금성전투이다 중공군은 휴전협정 체결전에 현재 철원 북쪽의 금성을 차지하기 위하여 마지막 대공세를 펼쳤고, 유엔군과 국군은 결국 금성 지역을 공산군 에 넘겨주게 된다 한반도의 분단은 더욱 굳어져 남과 북은 완전히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고, 미국과 소련을 주축으로 한 냉전 체제는 가속화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부터 2024년 2월 15일 현재까지도 이 대치 상태는 지속되고 있으며, 여전히 한반도는 동아시아의 화약고로 남아있다 [영상을 제작하며] 지난 6 25전쟁 영상에서, 특히 1951년 전선의 오류가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 아쉬움에 전선의 오류 수정 및 참고할 수 있는 상세한 전황표와 당시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삽입하여 1951년 6 25 전쟁의 고착화와 1 4 후퇴 이후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생생히 느낄 수 있도록 3번째 6 25전쟁 영상을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제작 시간과 스케일 문제로 1 4 후퇴 이전의 내용은 생략됐지만, 1950년의 낙동강 방어전과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가려져 우리가 상당히 알지 못했던 1951년의 위기와 전면전에서 국지전으로의 전쟁양상의 변화를 이 영상을 통해 사실적이고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 입니다 ====[Time Line]==== (왜 갑자기 표시 안되는데) 00:00 인트로 00:43 울프하운드 작전 00:58 선더볼트 작전 01:20 라운드업 작전 01:26 중공군 4차 대공세 (횡성 · 지평리 전투) 01:35 킬러 작전 01:50 리퍼 작전 02:28 커리저스 작전 02:56 러기드 작전 03:05 돈틀리스 작전 03:16 중공군 5차 대공세(1차 춘계공세) 03:58 중공군 6차 대공세(2차 춘계공세) 04:04 유엔군 재반격 04:34 전선 고착화 05:45 크레딧 ====[Credit]==== created by: crabsea(꽃게바다) manager: assistant crab(보조게) ====[사용자료]==== 『6 25전쟁 1129일』 -이중근 편저 정의의 진격 2부 (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