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23.12.27 악의 검침원(스가랴 9:1-8)

수요23.12.27 악의 검침원(스가랴 9:1-8)

악의 검침원 2023년 12월 27일 본문 말씀: 스가랴 9:1-8 (9:1)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하드락 땅에 임하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세상 사람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봄이니라 (9:2) 그 접경된 하맛에도 임하겠고 두로와 시돈은 넓은 지혜가 있으니 그들에게도 임하리라 (9:3)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보장을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정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은즉 (9:4) 주께서 그를 쫓아 내시며 그의 바다 권세를 치시리니 그가 불에 삼키울지라 (9:5) 아스글론이 보고 무서워하며 가사도 심히 아파할 것이며 에그론은 그 소망이 수치가 되므로 역시 그러하리라 가사에는 임금이 끊칠 것이며 아스글론에는 거민이 없을 것이며 (9:6)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하리라 내가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 (9:7) 그 입에서 그 피를, 그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하리니 그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두목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 (9:8)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무인도’란 실제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의 관찰과 점검의 대상화되어서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판단이 나버린 그 후에 ‘무인도’라고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 누구도 살지 않았고 그런 섬이 있는지 여부도 모른다면 ‘무인도’은 실은 없는 섬입니다 이 세상은 이처럼 인간들의 의식 안에서 있는 세상입니다 인간의 의식에서 밀려난 분이 있다면 이 세상은 무인도와 같이 없는 세상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지명 같은 것들도 그 지명과 관련된 인간들이 살고 있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 세상은 몽땅 불로 태워져 없어집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없애버리십니다 참으로 있는 세상은 천국과 지옥 뿐입니다 누가 천국가는 자일까요? 오늘 본문은 스가랴 선지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은 엄연히 있다고 자부되는 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추방되어 사라지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없앨려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 없애려는 이 세상에서 천국 백성을 모집하십니다 망하는 세상에서 망했다는 이유만으로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망하는 세상에서 같이 망해가면서 왜 망해야 합당한지를 하나님의 안목과 동일한 안목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자가 천국에 합세할 수가 있습니다 즉 이 세상에 ‘없는 자’만이 세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두로와 시돈을 유별나게 주목하십니다 그 이유는 인류의 최후의 모습을 실제로 구현하고 보여준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이 해안도시 민족들은 인간들의 내부에서 충동질된 성질이 이 땅에서 어떤 식으로 모습을 보여주는 지를 대변해주는 민족입니다 에스겔 28:12-13에 보면,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아름다운과 사치과 재력이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이런 데서 나오는 자신은 다음과 같은 고백으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 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어늘”(겔 28:2)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두로와 시돈이 어떤 식으로 살던 말던 나는 나대로 살고 내 형편대로 살면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겉으로 포장된 생각이고 내부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두로와 시돈에 주목하는 이유는, 모든 인간들의 지향성을 이 두 해안도시가 달성했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시돈과 두로를 부러워하지 않을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즉 인간들은 아무리 개인적으로 자기만의 인생을 산다고 우기지만 모두 이미 한 바구니에 담겨져 있는 형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면서 욕망조차도 모방합니다 즉 어느 누구도 세상 사는 의욕은 같은 성격을 지니게 됩니다 18세기에서 19세기 영국에서 살았던 벤덤이라는 공리주의자는 “인간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탐색했습니다 인간은 행복을 위해 산다고 보았습니다 그 행복이란 실은 쾌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쾌락을 양적으로 계산 가능하다고 여기는 자신이 가진 쾌락의 총량이 곧 그 사람의 행복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사람이 하루하루 사는 것은 쾌락을 긁어모으기 위해서랍니다 우량적인 쾌락은 다음의 7가지 조건에 충족되어 된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로, 쾌락의 강도(剛度)가 푸석푸석하면 안되고 단단해야 한다는 겁니다 둘째는 쾌락이 오래가야 한다는 겁니다 쾌락의 지속성입니다 셋째 쾌락은 확실이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모호하거나 추상적이면 안 된다고는 겁니다 넷째로 쾌락은 주변에서 쉬게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쾌락의 근접성입니다 여섯째로, 쾌락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있는 공간에서 반복해서 생산해내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쾌락의 생산성입니다 일곱째, 한가지 쾌락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쾌락이 좋다는 겁니다 쾌락의 범위성입니다 이러한 쾌락은 모두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과 나무의 보고 난 뒤, 인간 내부에 생긴 욕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기만 한 것”이 선악을 아는 나무 과실입니다 이런 쾌락이 긁어모아 두로는 참으로 번창한 해안도시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 나라의 공주 이름이 이세벨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오모리 왕은 자기 아들의 신부로 이 두로의 공주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 공주는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된 아합왕을 위하여 최선을 협조를 다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친정에서 익힌 ‘바알신의 번창신학’을 열성적으로 북 이스라엘에 전파했습니다 친정 나라처럼 이 북이스라엘도 번창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세벨은 남쪽 유다의 왕까지 자기 딸 아달랴를 시집보내었습니다 그 남편은 유다왕국의 다섯 번째 왕인 여호람입니다 이런 이세벨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2:20에서는 ‘음녀’라고 표현합니다 즉 겉모습은 여호와이지만 속은 바알입니다 인간의 보편적 악함은 인간의 사적인 악함을 능가합니다 즉 모든 인간은 유한한 악만 알뿐이지만 실은 이미 무한한 악의 통제 안에 있습니다 인간들이 신을 찾지만 참된 신은 ‘죽은 신’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행복과 쾌락을 위해서 자신이 굳굳히 살아있어야 하기 죽지 않는 신 바알을 선호한 겁니다 하지만 참된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 밀려 이 땅에서 사라져버린 신이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사라져버린 무인도와 같은 입장에서 이 세상을 덮고 있는 무한한 악에 대해서 늘 점검하고 검침하고 후딱 빠지는 선지자 자리에 있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예수 안’입니다 여부스 사람들은 한때 여호와도 모르고 다윗도 모르고 건방떨었지만 (삼하 5:6-8) 다윗에게 함락되고 난 뒤에는 한 여부스 사람(대상 21:18)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전체 이스라엘을 건지는 제단, 곧 성전이 세워지는 자리가 된 겁니다 바로 있어도 없는 자리요, 없음으로 있는 무한한 자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끝장 난 그 이후의 안목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