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영 목사가 서재에서 전하는 말씀 96 믿음은 용기를 낳습니다

남기영 목사가 서재에서 전하는 말씀 96 믿음은 용기를 낳습니다

96 믿음은 용기를 낳습니다 구약 성서 중 일곱 번째 책을 사사기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인솔로, 이집트를 탈출한 것이 주전 1250 년경이었다면, 그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끝내고, 그렇게도 기다리던 젓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으로 들어 가게 되었지만, 모세는 세상을 하직하고, 여호수아가 모세의 자리를 계승하게 됩니다 그러니 여호수아의 인솔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 건너편에서 요단강을 건넜던 것은, 주전 1210년 경이었을 것입니다 그 후,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난 다음부터 사울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등극하던 주전 1030년까지 180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제나 조직도 없었고, 그저 각 부족단위로, 서로 협력하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맨 마지막인 21장 25절을 보면,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 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하였노라’ 적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라고 한 것은, 각자가 제 멋대로 했다는 것은 아니고, 스스로 판단해서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사사기의 이 대목을 읽으면, 그게 바로 사람의 냄새가 물씬 나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겠 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태평성대처럼 보이는 그 시대에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활동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그들을 사사라고 부릅니다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사사기는 사사들의 활동과 그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사건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사사를 재판관이라는 뜻을 갖은 Judge 라고 하며, 사사기를 The Book of Judges 라고 합니다 하기야 우리들도 개역성경 전의 성경에서는, 사사기를 판관기라고 불렀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사들은 누가 임명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거를 해서 뽑는 그런 자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사사들은 집무실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평상시에는 자기의 생업을 돌보며 보통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의 주된 임무는 하나님의 마음을 백성 들에게 전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고을을 돌아다니며 설교를 하던지, 예배를 인도 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하던 중요한 일은, 외부의 침입과 같은 비상사태가 발생해서, 전쟁이라도 해야 할 경우가 생기게 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각 부족의 젊은이들을 동원해서 외적을 막아, 열 두 부족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백성들 간에 시비가 생기면, 그들의 잘 잘못을 가려주는 일도 맡아서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사사나 판관이나 재판관 또는 Judge 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기드온이나 삼손 같은 사람들은, 그들의 용감한 활동을 통하여, 우리가 어릴 적부터 들어서 친숙한 이름들입니다 이들은 대개 힘이 장사이고 용맹스러워서 적이 처 들어 올 때, 앞장서서 막아 냈던 그런 사람 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시기 4장을 보면 드보라라는 이름을 가진 사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여장부였습니다 그는 한 가정의 아내였고, 자녀들이 몇이나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이들의 어미였을 것입니다 그런 여인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스라엘 가운데서 남자들 못지 않게 사사로의 활약을 해 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사의 일을 보던 곳은 ‘드보라의 종려나무’ 라 불리우던 들판의 시원한 나무 그늘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서를 멀리서 바라보면 울렁거리는 바다의 파도를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하나의 나라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그 때부터 계속해서 반복되던 이스라엘 민족의 삶 속에서 울렁거리는 파도 같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잘못을 저지르면 하나님께서는 벌을 주시고, 그러고 좀 있다가, 벌이 힘들면 회개하고, 그러면 또 마음 약하신(?)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시고, 또 조금 빤 한가 싶으면, 못된 일들을 일삼고, 그러면 이를 바로 잡기 위하여 벌이 내려지고, 울부짖고, 용서하시고 이런 일들의 반복이 바로 구약 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인류의 역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사사기를 편집한 사람은 드보라와 바락의 이야기를 통하여 무슨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이겠습니까? 내가 보기에는 무엇인가 잘못 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용감하게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꼭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우리가 살아온 역사였고, 내일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그런 사람들에 의하여, 바른 괴도를 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사인 커브에 비유한다면 골짜기가 있은 다음에는 반드시 산 마루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게 인류의 역사가 아니었습니까? 그것은 한 나라의 역사도, 교회의 역사도, 인류의 역사도 결국은 이점에 대하여 만은 예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주도했던 용감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래도 이만한 우리의 오늘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이 절박한 경우를 당하여 필요로 할 때에 일어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사사 드보라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경에 기록된 드보라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여자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여자도 남자와 다를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까? 이것은, 위기에 처한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앞장섰던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여기 오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구약에서는 선지자 또는 사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려서 깨우쳐 주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란 공의(Justice)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원래는 왕이나,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장군들의 몫으로 되어 있었지만, 그들이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맡았던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때에는, 드보라와 같은 사사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드보라는 종려 나무 밑에 앉아서 사람들의 하소연만 경청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도 귀를 기우릴 줄 알았던 이스라엘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는 민족을 걱정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종교 개혁의 불을 붙였던 마틴루터나, 1960년대의 시민운동에 앞장섰던 마틴 루터 킹 목사 같은 사람도,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영적인 순라 꾼 노릇을 하던 사람 들이었습니다 순라 꾼이 무엇 하는 사람들입니까? 다른 사람 들이 자고 있는 동안에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깨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역사 속에서, 순라 꾼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행동으로 나서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을 오래오래 읽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위험은 밤의 도둑처럼 온다면서 정신 차리고 경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때에 우리는 졸거나, 먹을 것이 조금 풍부하게 되었다고 자축이나 하면서 취해 있어 서도 아니 될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원에 이르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때까지 서로 격려하며,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혜를 가지고, 모험을 즐기며 사는 사람 들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드보라도 시원한 종려 나무 밑에 앉아서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시비나 가려 주면서 살았으면 얼마나 편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바락과 함께 전장터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우리 주님도 따지고 보면, 그런 분 중에 한 분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잘못 되어 가고 있는 유대교를, 더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어서, 형식에 억매여서 하나님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못하던 동족들이 안타까워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던 분이 아니었습니까? 사람들은 주후 70 년에 폐허가 될 예루살렘의 성전을 생각 하시면서, 그것이 안타까워 울었을 것이라고 한다지만, 예수에게 성전보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그 당시 잘못되어가고 있는 데 대한 모든 화살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더 걱정스럽고 안타까운 것은, 오늘의 교회를 보면서 왜, 그 바리새파 사람들을 닮아가는 이들이 그리도 많은 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양 교회 건 한국 교회 건 마찬가지입니다 알맹이를 잃어버린 습관적인 교인이나, 돈타령으로 병든 자본주의적 교회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가 가지고 있던 문제점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도 보면 헌금은 내는 것만 중요하게 이야기가 되어 있지 그것을 옳게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는 통 언급이 없습니다 서양교회는 교인들 중에 교회와 사회의 자선단체를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국 교회를 크게 운영하는(?) 사람들 중에는 교회와 기업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부르짖던 때와 지금과는, 다른 것이 많습니까? 혹시라도 21세기의 루터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길 말고 다른 길은 없겠느냐고, 하나님께 애원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그 길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믿었기에, 그는 서슴지 않고 그 험한 길을 따르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구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밝히 보여 주십사 구하는 것과, 용기도 함께 주십사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