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선 시낭송 아카데미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의 기도 / 김 현 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 한 시간(時間)를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홀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이 글은 김현승론(論)이 아니다 김현승의 일화와 생애를 써보려고 한다 독자를 위해 쉽게 쓰려고 한다 시인 김현승의 대표작인 가을의 기도는 1956년 문학예술 4월호에 발표되었다 또한 그의 첫 시집인 김현승 시초에 수록되었다 1991년 미래사에서 김현승의 시선집을 내면서 시선집의 표제로 삼은 것으로 보아 김현승 자신이 대표작으로 여긴 것으로 추측된다 이 시의 요체는 기도와 사랑과 홀로 있는 고독을 노래했다 낙엽이 질 때 내게 모국어를 안겨주기를 바란 시인의 염원이 우리를 겸허하게 만든다 외래어가 범람하는 오늘의 시점에서 모국어를 사랑한 김현승의 가을은 비록 종교인이 아니라도 하늘과 땅에 대한 감사의 뜻을 두 손 모아 경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기도란 말은 어떤 힘 있는 절대자에게 소원을 비는 것을 말한다 내게 안겨준 모국어로 소원을 비는 것은 가을의 풍요를 바라기도 하지만 영혼이 맑아지고 마음의 풍요도 기원했으리라 다음은 사랑에 대한 지극함이다 사랑에 대한 대상이 누구든 오직 한 사람을 택하라는 지적이다 오늘날 부조리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인 것처럼 여겨진 현실을 생각하면 김현승의 사랑은 차원이 다른 사랑으로 보인다 이 사랑은 아름다운 열매가 익어가는 가을의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을 사랑할 뿐만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자연 모두를 사랑하라는 뜻일 것이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동일하게 본 것 같다 세 번째의 염원은 홀로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사색과 명상은 홀로 있을 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릴케가 쓴 가을의 시도 좋지만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는 모국어로 쓴 시로서 그 고귀함을 간직하게 된다 가을은 모국어가 그리운 계절이다 모국어로 나를 채워주기를 기도하는 시인의 마음이 김현승 시인 뿐만은 아닐 것이다 사색과 명상은 홀로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한 줄의 시구를 얻을 수 있는 것도 홀로 있을 때 가능하다고 본다 김현승은 1913년 4월 4일 평양에서 6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김현승은 기독교장로교 목사인 아버지 김창국과 어머니 양응도 사이에서 출생했다 그는 평양에서 월남해 아버지의 목회지인 제주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7세에 전남 광주의 양평동에 정착한다 기독교 계통의 숭인학교와 평양숭실학교 졸업 숭실전문학교 3년 수료 그 후 모교인 숭일학교 교사(1936년) 조선대학교 교수 문리대학장 숭전대학교 교수 광주에서 계간지 “신문학”을 6호까지 발간했다 무등산을 바라보며 시심을 키웠다고 한다 1934년에 “쓸쓸한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고 합니다”등 비교적 긴 제목의 시가 양주동의 추천으로 동아일보에 발표되면서 등단했다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했다 김현승은 특히 커피를 즐겨서 호를 다형(茶兄) 이라고 했다 귀인이 찾아오면 원두커피를 손수 끓여 대접했다 한다 언젠가 김현승을 기리는 학술 문학제에서의 일이다 김현승의 제자인 이근배 시인은 회고에서 조선대와 숭실대에서 제자들과 생활하던 모습과 수제자 였던 이성부 시인에 대한 회고담을 말했고 김현승의 막내 따님이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커피를 여간 좋아하지 않아서 늘 양림동 다방을 순회했고 요즘 말하는 커피바리스타들의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커피에 대한 전문적인 교양을 담은 글도 많이 남겼다는 일화를 전했다 김현승은 광주에서 가장 좋아하던 숲길로 수피아여고 뒷산과 조선대학교 교정 숲길을 걸으며 사색에 잠기고 또 자신의 시를 소리 내어 읽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김현승은 미당 서정주와 조선대학교 국문과 교수로서의 인연이 있어 남다른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 김현승과 특별히 친분이 있었던 임보 시인이 김현승과 겪은 일화를 소개할까 한다 임보 시인이 김현승을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라 한다 광주의 모 신문사가 주관하는 학생 문예작품 모집에 시가 당선되었는데, 그때의 심사위원이 조선대학교 교수였던 김현승이다 그런 인연으로 나는 김현승의 집에 가끔 드나들었다 광주 양림동의 넓은 뜰을 가진 한옥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시에 대한 말씀을 기대하면서 찾아가지만 김현승은 별말이 없었다 내가 서울의 대학에 진학한 1958년도 무렵 김현승도 모교인 숭실대학으로 옮겨오면서 수색에 자리 잡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20여 평의 조그마한 반 양옥집이었는데 그의 조촐한 방엔 손수 끓인 원두커피의 향기가 늘 가득했다 건너 방에선 서툰 피아노 소리가 들리곤 했는데 부인께서 피아노 레슨을 하며 가계를 돕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기독교 집안이기도 하지만 술과 담배를 거의 하지 않는 청교도적인 청정한 삶을 살았다 김현승의 성품은 대쪽같이 강직했다 옳다고 생각하면 뜻을 굽히는 법이 없었다 적당히 타협할 줄 몰랐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함부로 김현승을 대하지 못했다 한 번은 무슨 일로 조연현 평론가와 의견 충돌이 있었다 당시 조연현 평론가는 현대문학주간으로 문단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분이었다 김현승은 현대문학 추천위원의 자리를 내동댕이치면서 그와 싸운 일은 유명하다 제1회 시인협회상이 그에게 주어졌을 때 김현승은 수상을 거부했다 무슨 일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그 상이 자신에게 적절치 못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상을 타기 위해서 별 로비를 다 벌리고 작품을 발표하기 위해서 문예지의 주간들을 신주 모시 듯 하는 문단 풍토에서 본다면 김현승의 그 기개는 가히 지사다운 것이었다 김현승을 일러 “고독의 시인”이라고 부른다 무수한 고독의 시를 썼으며 고독을 주제로 한 시집 “견고한 고독” “절대 고독”이란 시집을 낸 것을 보더라도 그가 고독에 얼마나 심취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고독(孤獨)이란 흔히 부모 없는 아이나 독거노인을 고독으로 본다 김현승은 고독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 고독과 죽음 어느 것이 내성이 더 강한가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배고프고 물질의 부족으로 고독사에 이르는 게 아니다 고독을 이겨내는 내성을 기르지 못하면 고독사에 이를 수 있다 김현승은 고독을 즐기고 사랑하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에 사색과 명상을 통해서 고독을 이겨내고 도리어 고독을 활용해 자신의 사상을 시로 승화했다고 볼 수 있다 고독을 이겨내지 못한 사람들은 비관주의에 빠지게 된다 “세상은 살 가치가 없다 허무한 것이다 ” 이런 염세사상에 빠지면 인생을 비관하게 된다 고독이 저만치 앞서가다가 죽음이란 놈이 고독의 눈치를 채고 앞질러가게 되면 사람들은 죽음이 만만한 놈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때가 늦어 손쓸 수 없다 하지만 김현승의 고독은 비관적이 아니고 낙관적이다 그의 고독은 정직하다 신을 만들지도 않는다 그의 고독은 자유스럽다 어떤 사람들은 군중 속의 고독을 말하지만 김현승의 고독은 군중 속의 고독을 거부하고 술을 마시고 나태하지도 않는 고독으로 보인다 그의 고독한 이유는 낙관적인 목적이 있다 아무 목적도 없는 고독은 불안한 것이지만 마음 밑바닥에 낙관하는 고독이 있기 때문에 고독을 지기(知己)로 여기고 불안의 삶을 거부한 채 고독의 시인으로 살아왔다 김현승의 시의 특징은 한국시인 중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을 인용한 시가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그 이유를 떠나서 그렇다는 것이다 성경을 인용한 시가 많다는 것은 종교인으로서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그런데 가령 미당 서정주의 경우를 보면 불교인이었지만 미당의 시에 불교의 교리를 인용한 시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미당의 시는 불교적 향기가 은연중에 배어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내부에 스며있다 김현승과 대조적이라 하겠다 여기서 그 장단점을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김현승 시의 특징은 신과의 관계다 신과의 관계는 고독으로 나타난다 그가 의지했던 믿음이 신에 의지하는 고독이다 그의 고독은 긍정적인 구원의 고독으로 나타난다 또 하나의 시의 특징은 절제된 언어다 추상적 관념을 사물화하거나 구체적 사물을 관념화했다 그의 시는 조소성과 명징함에 있다 후기로 오면서 신에 대한 회의 인간적 고독은 시의 주제로 줄기차게 추구했다, 김현승은 아직 문학관이 없다 그의 출생지는 평양이지만 문학관이 세워진다면 그가 오래 살았던 광주에 세워지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보이나 그가 말년에 교수로 근무한 서울 숭실대학교에 세워지는 것도 합리적이라 생각된다 광주시는 광주 남구 양림동에 김현승문학관을 가칭 “한국참외박물관”이란 이름으로 건립하겠다고 밝혔다 김현승이 양림동에서 생활한 것을 감안해서 그의 체취가 어린 곳에 문학관을 세우기로 계획 중이라 한다 양과동에 참외가 많이 재배된 것을 감안해서 “한국참외박물관”이라 이름을 짓고 시민에게 제공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아직 문학관을 세울 예산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의 시비는 무등산 국립공원에 “눈물”의 시비가 있다 양림 동산에는 “가을의 기도” 시비가 있다 그리고 호남신학대학에 펜촉 모양의 시비 “벤치에서”가 있다 그의 시집에는 김현승 시초 옹호자의 노래 견고한 고독 절대고독 마지막 지상에서 김현승 전집 등이 있다 茶兄 김현승은 62세 되던 1972년 봄에 대학의 강당에서 예배를 보던 중에 의자에 앉은 채로 조용히 영면했다고 한다 “가을의 기도”를 받아드린 신(神)이 배려해 준 것일까 그의 성품처럼 맑고 곧은 죽음이었다 이승과 궁합이 잘 맞지 않아 하늘이 좀 일찍 데려간 것 같다 (끝) 2019년 '시인정신' 겨울호 정일남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