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 100주년 기획 ㉚ - 대구만세운동을 이끈 민족의 지도자 이만집 목사 (CTS, CTS뉴스, 기독교방송, 기독뉴스, 기독교뉴스, 교계뉴스)
CTS뉴스는 3.1운동 백주년을 앞두고 3.1운동 역사를 간직한 교회와 지역, 단체를 재조명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은 1919 년 서문시장에서 시작된 대구의 만세운동에 대해 전해드리겠습니다. 교사로, 독립운동가로, 사회운동가로 또 목회자로 1인 4역을 감당한 대구 만세운동의 중심, 이만집 목사의 이야깁니다. 신규식 기자가 소개합니다. 대구 중구 남성로. 대구제일교회 구예배당 맞은편에 위치한 교남YMCA회관은 1914년 미 북장로교 대구선교지회가 청년 전도를 목적으로 건립해 1938년까지 대구 YMCA 전신인 교남 YMCA 본부로 사용했습니다. 교남기독청년회관으로 쓰인 이곳은 한 때 철거 위기에 내몰렸으나 대구시민 모금운동으로 지난해 100년전 모습으로 복원돼 시민들에게 개방됐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교남YMCA 회관은 당시 물산장려운동 뿐아니라 기독교 농촌운동과 대표적 항일 단체인 대구 신간회 활동 등을 지원했으며, 1919년 대구 3.8 만세운동의 주요 지도자들이 회합하는 공간으로도 사용 됐습니다. INT 손산문 부이사장 / 대구 YMCA 교남 YMCA 초대회장인 이만집 목사는 대구제일교회 목사이자 계성학교의 첫 한국인 교사로서 대구 3.8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습니다. INT 정경호 위원장 / 대구 기독교 3.1운동 100주년 위원회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장날 오후2시. 이만집 목사는 미리 준비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조선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교회와 학교에 미리 연락된 학생들과 군중들의 만세 행렬로 이어졌습니다. 천여 명의 만세 행렬이 이어지자 일본 경찰들은 이를 저지하기위해 총칼을 휘두르며 진압에 나서 157명의 시위 군중들이 체포했습니다. 만세운동의 가장 선두에 섰던 이만집 목사는 3년 징역이라는 최고의 형량을 받고 옥고를 치뤘습니다. 하지만 이만집 목사가 이끈 대구만세운동을 시작으로 경북 전역은 의성을 필두로 안동과 영덕까지 만세운동이 확산됐습니다. 이만집 목사는 학생에겐 교사로, 청년들에겐 사회봉사자로, 나라 잃은 민족에겐 독립운동가로 역할을 감당하며 세상속의 크리스천 리더로 삶을 살았습니다. INT 정경호 위원장 / 대구 기독교 3.1운동 100주년 위원회 CTS뉴스 신규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