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뉴스] 3.1 100년 기독교인 서명자⑦ 친일 변절 정춘수, 박희도 목사

[CBS 뉴스] 3.1 100년 기독교인 서명자⑦ 친일 변절 정춘수, 박희도 목사

CBS는 3 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기독교인 16명의 삶과 신앙을 특별기획으로 조명합니다 오늘은 서명 후 친일로 돌아선 정춘수 목사와 박희도 전도사를 유영혁 기자가 소개합니다 ------------------- 정춘수 목사는 기독교조선감리회 제 4대 총리사, 요즘의 감독회장을 지낼 정도로 서명을 전후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재판도중 서명에 대한 애매한 입장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인터뷰]손승호 박사/연세대 0200 "박희도와 오화영이 하는대로 나는 따라갈테니 나머지는 처리를 해달라 라고 돌아갔는데, 나중에 알고봤더니 자기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르게 일이 진행돼 있었던 그런 케이스입니다 정춘수 목사는 독립선언 서명자라는 이유 때문에 감리교내에서 지명도가 높아졌습니다 [인터뷰]손승호 박사/연세대 0240 "민족대표 33인 중의 하나라고 하는 네임밸류가 굉장히 높았기 때문에, 그리고 본인이 언변이 또 좋으시고요 굉장히 각광받는 연사로 활동을 많이 하시면서, 이제 교계 안에서도 영향력을 많이 쌓으셔서 총리사, 말하자면 지금의 감독회장까지 굉장히 오래 하셨습니다 일제의 통치가 강화되면서 입장도 점차 바뀌었으며 감리회 감독회장으로 일하면서는 노골적으로 친일행각을 벌였습니다 [인터뷰]손승호 박사/연세대 0450 "행정명령 같은 것들을 많이 내려서 일제의 침략 전쟁을 지원하는 병참 기지로서의 감리교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셨고요 막판에 가면 교회들을 매각을 해서 그 매각자금을 가지고 군자금으로 제공을 하는데, 그걸 전국을 돌아다니시면서 진두지휘를 하셨어요" 정춘수 목사는 해방후 친일행적 논란으로 눈총을 받자 천주교로 개종했습니다 박희도 목사는 서명 당시 서울 창의문감리교회 전도사로 서명자 가운데 가장 젊었습니다 젊은층의 만세운동 세력을 모으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인터뷰]홍승표 박사/감신대 0620 "서울 시내의 전문학교,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대표단을 규합하고, 정보를 전달하고, 소위 민족대표들의 입장을 지령을 내리거나 서로 조율을 하는 그런 역할들을 박희도가 했고요 " 박희도 목사는 20대에 사회주의를 받아들였으며 자신이 창간한 신생명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2년 6개월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30년대에 들어서면서 친일로 입장이 바뀌었으며 동양지광이라는 잡지를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친일의 길로 들어섭니다 [인터뷰]홍승표 박사/감신대 "조선인들을 일본화하는 데에 선전, 선동을 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잡지였습니다 내선일체라든가, 조선인 징병을 촉구하는 그런 언론활동을 폈죠 그러니까 철저하게 일본 제국주의 당국이 원하는 조선인들을 철저하게 황국신민화하는 그 일에 부역하는 일을 1937년 이후부터 아주 노골적으로 전개하고요" 박희도 목사는 해방후 친일을 한 목적이 자신의 내심을 숨겨야 할 필요가 있어 어쩔 수 없이선택했다고 변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