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병 / 실존주의 철학의 아버지,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 실존주의 철학의 아버지, 키에르케고르

#실존주의 #절망 #키에르케고르 쇠렌 키에르케고르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주의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데요, 왜일까요? 그것은 아마 당시에, 인식론적 관념론이 서양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키에르케고르가 최초로 개인의 실존적 고뇌를 철학의 주제로 삼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 키에르케고르가 살던 시대에는 칸트, 피히테, 셸링, 헤겔의 영향으로 철학의 주된 관심사는 특수한 개인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에 대한 보편적 진리였습니다 그러한 철학적 행로를 실존하는 개인에 대한 개인적 진리로 바꾸려고 시도한 철학자가 키에르케고르엿습니다 키에르케고르가 개인의 실존에 천착하게 된 계기를 아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는데요,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56세였고, 어머니는 그 집안의 하녀였습니다 본부인이 죽자 1년도 안되어서 그 하녀를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따라서 키에르케고르는 첩의 아들이었던 것이죠 당시의 도덕적 관점에서는 이것은 매우 부도덕한 행위로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게다가 7남매 중 5남매가 불과 몇 년 사이에 죽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하여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던 헤겔철학에 반기를 들고, 그러한 보편적 진리라는 거대 담론 속에 묻혀버리는 자신과 같은 특수한 개인의 삶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고찰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세 가지의 실존과 절망의 세 단계”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1 실존의 세 가지 :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 으로 나뉘었습니다 a 심미적 실존 : 키에르케고르는 가정의 불행한 사건들 때문에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향락적인 삶이 계속될수록 더 공허해지고 더 큰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육체적 쾌락의 증가는 정신적 고독의 증가를 불러왔던 것이죠 “나는 야뉴스와 같이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한 얼굴로는 웃고 한 얼굴로는 울고 있다 ” 이렇게 말한 그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심미적 실존은 결국, 인간을 쾌락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파멸의 길로 안내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그를 심미적 실존에서 구해준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레기네 올센이었습니다 그래서 심미적 실존에서 윤리적 실존으로 들어섭니다 (b 윤리적 실존 :) 레기네 올센은 아마도 맑고 순순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녀를 만난 것이 키에르케고르가 심미적 실존에서 벗어나 도덕적 삶을 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죠 윤리적 실존이란 오만과 허영이 아닌 진실과 양심으로 살아가는 도덕적 인간을 말합니다 윤리적 실존의 특징에는 성실, 겸손, 반복 등이 있습니다 성실, 겸손 반족, 그 중에 제일은 반복입니다 반복이 특히 강조되는 것은 아마도 일상성의 소중함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희망은 우리를 유혹하는 과일이지만 우리를 배부르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반복은 축복으로서 배를 채워주는 그날그날의 빵이다 ” 우리는 일상에서 새롭고 특별한 일이 일어나기를 언제나 바라지만, 새롭고 특별한 것이란 잠깐의 달콤한 맛은 될 수 있어도 우리의 삶을 살찌우지는 않습니다 새롭고 특별한 일은 일상성이 전제될 때에만 가능한 것이죠 반복되는 일상성의 가치를 알고 반복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자가 용기 있고 슬기로운 자입니다 그러나 도덕적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무한한 확장을 꿈꾸는 유한한 인간이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자각하게 되었을 때 여지없이 절망이 찾아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종교적 실존으로의 전환입니다 (C 종교적 실존) “모든 인간이 육신의 병을 품고 살아가듯이 모든 실존은 절망이라는 정신의 병을 품고 살아간다 ”라고 했는데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자기 확대를 꾀할 때, 시간 속에 있는 인간이 영원을 바랄 때, 상대적인 인간이 절대적인 것을 추구할 때 절망이 생깁니다 이때 실존하는 인간은 인간의 유한성과 불완전성을 자각하고 절망을 의식하게 됩니다 절망의 의식은 언제나 실존적 자각과 함께합니다 실존적 자각이 커질수록 절망의식도 커지게 되는 것이죠 절망의식을 가진 실존은 신 앞에 홀로 서서 신과 올바르게 관계를 맺고 종교적 실존자로서 살게 됩니다 종교적 실존의 특징은 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죠 정리하자면 세 실존을 기억하는 것이 좋겠는데요 그것은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입니다 심미적 실존은 인생의 쾌락만은 추구하면서 방탕한 생활에 빠지는 인간을 말하구요 윤리적 실존은 진실과 양심으로 살아가는 도덕적인 인간을 말하구요 종교적 실존은 신 앞에 홀로 서서 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말합니다 2 절망의 세 단계 무지의 절망, 자기 포기의 절망, 반항의 절망 절망은 a 첫 번째 절망은 무지의 절망입니다 자신의 실존적인 삶이 절망적인 상태이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단계이다 자기가 절망 상태에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이죠 쾌락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자, 탐욕스러운 자, 교만한 자 그러한 자들이 무지의 절망인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치명적인 절망은 아닙니다 자신이 처한 절망을 자각하면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죠 b 두 번째 절망은 자기 포기의 절망입니다 이것은 자기 부정의 절망입니다 자기의 절망적인 실존을 자각하고 절망하면서도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절망이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죠 윤리적 실존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도덕적 실존에 이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자각하게 될 때 자기혐오, 자기부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 자기 포기의 절망입니다 c 세 번째 단계의 절망은 반항의 절망이다 이것이 가장 치명적인 절망이죠 이는 절망에의 의지로 나타납니다 즉 절망하여 절망 속에 머무르려고 하는 절망이다 절망을 의식하면서도 그대로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절망이죠 절망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모든 절망을 품고서 “신 앞에 홀로 서는 것”이지만 “절망하여 자기 자신 그대로이고자 하는” 절망입니다 이것이 죽음에 이르는 절망이며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신에 귀의함으로서 절망을 극복할 수 있지만 그는 거부한다 절망 자체보다는 절망에 의지하는 것, 절망에 머무르려고 하는 것, 그것이 가장 치명적인 절망입니다 절망이 반드시 죽으로만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독자로서 신 앞에 홀로 서서 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때, 이 절망이라는 정신의 병은 죽음이 아닌 영원한 생명으로 안내하는 이정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절망이란 완전히 벗어나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반드시 겪어야 할 실존적 체험인 것이죠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사적 의의는 절망을 안고 살며 절망을 극복하는 올바른 방법을 배우고, 그것을 통해서 자아의 실존적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신 앞에 홀로 서서 신에게 더 가까워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오늘 절망과 더 가까운 친구가 되어야겠습니다